[책과 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사이조 나카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2019) 편의점에 들렀다가 겹겹이 쌓인 초콜릿 바구니들을 보고 밸런타인데이 주간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이젠 너무 익숙해진 말, 밸런타인데이가 제과 회사의 상술이 만들어낸 환상의 풍습이라는 뉴스가 슬슬 나올 때도 됐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은 늘 초콜릿을 주고받는다. 사람들이 상술을 몰라서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 진심을 전하는 건 늘 어려우므로 달력 속 날짜를 핑계 삼기 때문일 것이다. 초콜릿은 아니지만, 이런 계절에 어울리는 책들도 있다. 일본 에도 시대의 과자점을 그린 <오늘은 뭘 만들까 과자점>이 그런 책이다. 에도성 성문 서쪽, 시내에서 떨어진 뒷골목에 있는 작은 과자점 난보시야는 고급 과자를 납품하는 가게는 아니다. 다른 지방의 과자들을 그날그날 기분대로 만들어, 서민들이 싼값으로 사 먹어볼 수 있는 곳이다. 주인은 지헤에라고 하는 60대의 노인이다. 그는 차분하고 손님 응대를 잘하는 딸 오에미, 기발하고 씩씩한 손녀 오키미와 함께 난보시야를 운영한다. 그리고 그들이 내놓는 과자에는 삶의 비밀, 슬픔과 용서, 어릴 적의 추억, 인간사의 인정이 어려 있다. 소설의 각 장은 난보시야에서 내놓는 과자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과자의 유래를 따라가다 보면 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릴 적 먹었던 카스테라에는 미처 말 못한 아버지의 애틋한 정이 있었다. 반대로, 솔잎을 닮은 과자에는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복잡한 마음이 있었다. 경단 위에 찹쌀 알갱이가 붙은 모양이 가시 같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이가모찌는 애증이 깔린 뾰족한 마음의 상징이었다. 메추리를 닮은 커다란 떡 오오우즈라모찌에는 형제 간에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우애가 있었다. 매화 모양의 과자 우메가에에는 한순간의 흔들림일 뿐일지라도 평생을 환히 비추는 연심이 깃들었다. 뒷면이 희멀건하게 쓸쓸하다고 해서 솔숲을 지나는 바람이라는 뜻의 마쓰카제 과자는 장성한 자식을 결혼시키는 부모의 서운함을 빚어냈다. 마지막으로, 평생 다른 사람의 과자만을 흉내 내던 지헤에가 마침내 딸과 손녀의 힘을 빌려 스스로 만든 달 모양의 만주인 난텐즈키가 있다. 날과 계절 따라 차고 이지러질지라도 늘 떠오르는 달처럼 사람들은 인생에 스산한 슬픔과 실망이 있어도 꿋꿋이 살아간다. 과자에 관한 이야기지만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세상의 모든 단것들에는 쓴맛도, 짠맛도, 신맛도 같이 들었다는 생각을 해 보면 당연하다. 사람 사이의 정과 인연은 사사로운 일이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돌릴 수 없었다. 그래도 난보시야의 사람들은 계속 과자를 만들어가며 서툴지만 깊은 애정을 그 속에 담는다. 밸런타인데이가 지나면 헐값으로 떨어지는 초콜릿들처럼 많은 소설이 한 번 읽히고 잊히는 운명으로 간다. 달콤한 이야기를 전하는 소설들이 보통 그런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인생에서 기억할 만한 날들에는 늘 떡, 과자, 케이크, 초콜릿 등 달콤한 것들이 있었다. 하루하루가 전혀 특별하지 않게 이어지는 것 같아 버겁고 외로웠던 날에 달콤한 것을 먹고 버틸 수 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소설들이 있다. 정교하게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라도, 달콤해서 위로되는 것들. <오늘은 뭘 만들까 과자점>은 그런 따뜻함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은 소설이다.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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