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교양이다”라는 선언은 한국의 과학자들이 어정쩡한 ‘가치중립성’의 틀을 흔들어보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4대강과 원전에서 인공지능과 기후변화까지 과학의 문제를 푸는 것은 곧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표현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과학은 교양이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과학 칼럼 모음집 <김상욱의 과학공부> 서문에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과학을 이 시대의 교양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황우석, 새만금, 4대강, 광우병, 지구온난화, 신종 인플루엔자, 천안함, 원전, 메르스, 가습기 살균제. 이들은 우리 사회 주요 사건들의 키워드이다. 이들은 모두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과학을 빼고서는 현대 사회의 어떤 문제도 이해하거나 해결할 수 없고, 그래서 한국 사회에 과학이라는 교양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의 힘과 중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김 교수를 포함한 여러 과학자들은 왜 “과학은 교양”이라고 애써 주장해야만 하는가? 과학은 왜 교양이 아니게 되었는가? 과학이 교양에서 멀어진 것은 시민들이 과학 공부를 게을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과학의 눈부신 발전의 결과이자 징표였다. 20세기 이후 과학은 점점 세분되고 전문화되어, 극소수의 전공자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과학사학자 시어도어 포터 교수는 이런 변화를 “과학이 테크니컬해졌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테크니컬’이란 단지 내용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뜻이 아니다. 과학의 본질이 비전문가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기술적인 것’을 다루는 일에 있으며, 그 공고한 영역 밖을 기웃거리면서 가치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과학자의 임무가 아니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과학의 ‘객관성’ ‘가치중립성’ 같은 말들이 이런 선 긋기를 뒷받침해왔다. 기술적인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만 한다면 과학자는 다른 일에 무관심해도 괜찮았다. 과학은 점차 우리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 궁리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과학은 과학자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포터 교수가 지적했듯이 ‘가치중립’의 구호를 내건 과학은 실제로는 주로 정부가 요구하는 데이터와 실적을 충실히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시스템 안에서 전문성과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시스템 자체의 원칙과 방향을 설정하는 일에서는 배제되었다. 정치인과 관료는 “그런 기술적인 부분은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 하고, 과학자는 “우리는 기술적인 부분만 다루기 때문에 나머지는 정부가 판단할 일”이라며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가운데 과학의 자리는 더 좁아졌다. 특히 한국에서 과학자는 ‘가치중립’이라는 명분 아래 국가가 설정한 경제적 가치 이외의 다른 가치에 무관심할 것을 요구받았다. 국가에서 부여하는 가치가 곧 과학의 가치였다. “과학은 교양이다”라는 2016년의 선언은 한국의 과학자들이 어정쩡한 ‘가치중립성’의 틀을 흔들어보려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다. 과학의 가치를 ‘테크니컬’한 전문 영역 안에 가두어 두지 않고, 국가가 설정한 단일한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과학이 교양이라는 주장은 과학 지식이 개별 과학 분과를 발전시키고, 과학자의 취직과 승진에 도움을 주고, 특허나 창업을 통해 이윤을 만들어내는 등의 기능 외에, 시민들의 정치적 의식, 사회적 행동, 도덕적 감수성을 형성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말이다. 과학에서 얻은 지식과 태도를 가지고 이 사회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더 잘 분별하고, 그것을 어떻게 성취해야 할지를 더 잘 결정하자는 제안이다. 과학을 교양으로 삼자고 말할 때 과학자는 과학이 공동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으며 자신이 그 가치를 대변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것이다. 교양이 된 과학은 더 넓은 자리에서 더 큰 책임을 맡을 수 있다. 과학이 시민 모두의 교양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으면서 동시에 가치중립적일 수는 없다. 교양은 가치중립적인 정보의 집합이 아니다. 한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쌓여서 표출되는 것이다. 교양은 단지 전문 지식을 쉽게 풀어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밑천으로 하여 가치 있는 사회적 삶을 꾸려나가는 경험을 통해서 축적되고 확장된다. 4대강과 원전에서 인공지능과 기후변화까지 과학의 문제를 푸는 것은 곧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표현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테크니컬’한 과학만으로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다. ‘가치를 품은 과학’이라는 교양이 필요하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