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을 만들거나 사이보그가 되면서 우리는 어떤 세상을 상상한다. 앞당겨야 할 세상도 있고, 막아내야 할 세상도 있다. 우리는 파일럿 김병욱씨를 통해 인간이 만든 길이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세상을 상상하고, 로봇 휴보를 통해 인간이 만든 땅에 인간이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인간과 기계가 함께 일할 때.” 10월8일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아레나 앞에는 이런 문구를 담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최초의 사이보그 올림픽”이라 불리는 사이배슬론 행사가 열린 날이었다. 이 대회에는 장애인, 공학자, 의학자가 함께 꾸린 66개 팀이 6개 종목에 참가했다. 첨단 의족과 의수, 휠체어와 강화 외골격, 뇌파 감지 장치 등의 도움을 받은 장애인들이 기계의 힘과 사람의 힘을 합쳐 실력을 겨루었다. 한국에서도 고려대 뇌공학과 이성환 교수팀, 연세대 작업치료학과 김종배 교수팀, 서강대 기계공학과 공경철 교수팀이 각기 다른 종목에 참가했다. 언론에서는 ‘사이보그’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지만, 경기에 참가한 장애인 선수들을 일컫는 공식 용어는 ‘파일럿’이었다. 파일럿은 수많은 기술에 둘러싸여 도움을 받으면서도 자율적으로 비행기를 조종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저마다 크기와 종류가 다른 기술과 결합하여 사이배슬론에 나선 이들을 파일럿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래서 적절해 보였다. 시험적으로 방송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처럼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을 처음 시도한다는 의미에서도 그들은 파일럿이었다. 공경철 교수팀(SG메카트로닉스, 세브란스재활병원)의 파일럿은 1998년에 사고로 두 다리가 마비된 김병욱씨였다. 그는 갑옷처럼 몸을 감싸고서 전동장치를 통해 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강화 외골격을 착용하고 트랙 앞에 섰다. 소파에 앉았다 일어나기, 일렬로 선 막대 사이를 지그재그로 통과하기, 문 열고 닫기, 징검다리처럼 놓인 돌을 밟고 걸어가기, 경사면 밟고 지나가기를 거쳐 마지막 과제인 계단을 앞에 두고 김병욱씨는 크게 기합을 넣었다. 경기장 내 대형 화면으로 그의 근육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내려오는 계단을 서너 개 남겨두었을 때 제한시간 10분이 다 지났다. 그는 끝까지 계단을 내려와 경기를 마쳤다. 사이보그 파일럿들의 경기를 지켜보면서 작년 여름 미국에서 열린 다르파 로봇 챌린지 대회를 떠올리지 않기는 어려웠다. 카이스트 오준호 교수팀의 로봇 휴보가 다르파 대회에서 우승했듯이 공경철 교수팀의 파일럿 김병욱씨가 3위에 오르는 좋은 결과를 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로봇과 파일럿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 중에는 비슷한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혼자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점이 같았다. 넘어지지 않고 걷는 것 자체가 공학의 성취이자 인간의 승리였다. 또 김병욱씨처럼 휴보도 거친 지형을 통과하고,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야 했다. 휴보와 김병욱씨가 힘겹게 계단에 발을 올렸을 때 관중은 큰 박수로 고된 연구와 훈련의 과정을 인정하고 앞으로 인간과 기술이 함께 디딜 걸음을 미리 축하했다. 대체로 닮은 점이 많았던 다르파 로봇 대회와 사이배슬론은 휴보와 김병욱씨가 과제를 수행하는 시나리오의 설정에서 주목할 만한 차이를 보였다. 두 경기장은 바깥세상에서 로봇과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상황을 모사해 놓았다. 그 안에서 김병욱씨와 휴보는 비슷한 동작을 했지만, 하나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다른 하나는 급박한 재난 현장을 배경에 깔고 있었다. 사이배슬론이 장애인들이 움직이고 살면서 항상 맞닥뜨리는 조건들을 제시했다면, 다르파 대회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오염된 현장에 사람이 들어갈 수 없어서 로봇이 투입되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출발했다. 김병욱씨는 지금껏 밟지 못했던 거리를 스스로 걸어보려 했고, 휴보는 인간이 사라진 파국의 현장을 수습하러 걸어 들어갔다. 같은 걸음이지만 다른 세상이었다. 로봇을 만들거나 사이보그가 되면서 우리는 어떤 세상을 상상한다. 앞당겨야 할 세상도 있고, 막아내야 할 세상도 있다. 우리는 파일럿 김병욱씨를 통해 인간이 만든 길이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세상을 상상하고, 로봇 휴보를 통해 인간이 만든 땅에 인간이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김병욱씨가 사이배슬론에서 성공적으로 수행한 시나리오는 현실에서 반복재생되어야 하지만, 다르파 대회에서 휴보에게 주어진 시나리오는 경기장 밖에서 현실이 되지 말아야 한다. 스위스 아레나를 빠져나오면서 나는 김병욱씨가 사이배슬론 경기장을 걷듯 서울 거리를 걷게 되는 날을 상상했다. 큰 지진에 이어 발생한 원전 사고 때문에 휴보가 경상도 어딘가로 투입되는 날은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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