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자율주행차의 대결’이라는 인기 있는 프레임은 자율주행차와 대결을 벌인 인간이 공교롭게도 모두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가려버렸다. 이 우연 아닌 우연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날 여성 운전자들이 ‘인간’이 아니라 ‘여성’을 대표해서 운전했기 때문이다.
카이스트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자동차계의 알파고 대결이 온다!” 지난주 경기도 판교에서 ‘세계 최초’로 열린 ‘자율주행 모터쇼’의 하이라이트는 ‘자율주행 자동차 대 인간 미션 대결’이었다. 인간이 모는 차와 자율주행차가 장애물을 피하고 구불구불한 경로를 통과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결과를 비교한다는 설정이었다. 출발선에는 대결을 벌일 양편의 자리를 표시하는 플래카드 두 개가 걸렸다. 한쪽은 ‘인간’(Human), 다른 쪽은 ‘자율’(Autonomous)이었다. 범주 설정의 오류 같았지만 일단 흥미롭게 지켜보기로 했다. 이 운전 대결은 알파고 대국처럼 긴장과 환호가 교차하는 역사적 현장이 되지는 못했다. 주최 측은 운전 경력에 따라 나눈 운전자 그룹마다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을 배정했다. 하지만 배터리 문제 등으로 자율주행차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탓에 처음 계획과 달리 자율주행차와 대결하는 기회는 여성 참가자에게만 주어졌다. 공을 들여 개발한 자율주행 기술을 탑재한 자동차는 안타깝게도 장애물에 부딪히다가 멈춰 서곤 했다. 각 대결은 여성 운전자들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다. 자율주행차가 아직 갈 길이 멀다거나,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았다는 식의 반응이 나왔다. 언론은 이 승리를 ‘인간’의 승리로 확대해석했다. “자율주행 차량 대결서 인간 완승”이나 “자율주행차, 인간과 운전 대결 전패” 같은 제목이 등장했다. ‘인간과 자율주행차의 대결’이라는 인기 있는 프레임은 자율주행차와 대결을 벌인 인간이 공교롭게도 모두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가려버렸다. 이 우연 아닌 우연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날 여성 운전자들이 ‘인간’이 아니라 ‘여성’을 대표해서 운전했기 때문이다. 이 행사는 단지 ‘인간’ 대 ‘자율’의 대결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와 ‘자율’의 삼자 대결인 것처럼 보였다. 여성의 운전 능력을 시험한 것은 자율주행차만이 아니었다. 여성 운전자는 계속해서 남성 운전자를 기준으로 삼아 비교당했다. 운전자로서 일반적인 여자는 일반적인 남자와 다르다는 생각, 대개는 여자가 남자보다 운전 능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행사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자율주행차와 실력을 겨룬 여성들은 여성 운전자에 대한 통념으로 포장된 길을 달렸다. 남자 참가자들 못지않게 ‘어머니’도 잘하실 수 있을 거라는 격려, ‘어머니’를 위해 더 자세하게 설명해드리겠다는 친절, 경기 코스가 여성 참가자 몸매처럼 ‘에스라인’이라는 비유, 차 안에 설치된 카메라로 보니 운전대를 잡은 손의 피부가 정말 곱다는 칭찬까지, 운전대를 잡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명확히 구분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장애물은 코스 안과 밖에 모두 있었다.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였지만, 자율주행차를 이긴 여성 운전자 한 명은 인간과 기술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이너였다. 자율주행차 개발의 현장을 목격하기 위해서 경기 참가를 신청했다. 안타깝게도 이 운전자는 옆 차선의 자율주행차 내부를 찬찬히 관찰할 기회는 얻지 못했다. 이날 그가 맡은 역할은 서툴게 운전하는 젊은 여성일 뿐이었다. 자율주행차와 마지막 대결을 벌인 여성 운전자는 기자들과 인터뷰를 한 후 추위를 피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앞서 ‘어머니’라고 불리던 참가자였다. ‘어머니’의 운전 실력을 지레짐작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냐며 내가 던진 유도성 질문에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행사장 뒤편 주차장에는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 택시 운전석에 오른 ‘어머니’는 유유히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그는 25년 경력의 택시운전사였다. 사람이 차에 손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남자들은 여자에게 근거 없는 우월감을 느낄 소재를 하나 잃을지도 모른다. 자동차와 운전은 기본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라는 통념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현재 교통 패러다임에 자율주행차 못지않은 큰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자율주행처럼 혁신적인 기술은 일자리를 빼앗아 갈 수도 있지만, 지금껏 당연하게 여기던 고정관념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우리는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자율적 기계와 여성의 자율을 불편해하는 사회적 통념 모두에 현명하게 대응해야 한다. ‘자율’은 ‘인간’의 대척점에 놓는 것이 아니라 여자와 남자와 기계가 합리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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