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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29 19:06 수정 : 2018.11.30 11:39

인프라가 눈부신 활약을 하기보다는 무겁게 제자리를 지켜주기를 기대한다. 이는 인프라가 절대 망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사고와 고장에 대비해서 언제라도 달려올 수 있는 경험 많은 사람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케이티(KT) 아현국사 화재가 드러낸 것은 통신 기술의 ‘무거움’이다. 디지털 통신은 가벼워서 빠른 것이 아니라 무거워서 빠르다. 사람과 사람, 컴퓨터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통신은 더 빨라지는 동시에 더 무거워졌다. 더 많은 전선, 설비, 건물, 사람이 통신 인프라를 구성하면서 비로소 더 빠른 연결이 가능해졌다.

통신 산업은 통신의 속성 중 빠름을 앞으로 내세우고 무거움을 뒤로 숨기는 데에 성공했다. 통신 서비스의 질은 영화 한편을 내려받는 데 걸리는 시간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통신 서비스 사용자는 통신이 공기처럼 가볍고 마법처럼 신기한 무엇이라고 믿게 되었고, 뒤로 숨겨진 케이블, 설비, 사람의 무거움은 잊었다. 문제는 통신 사업자가 이 무거움을 자신의 시야에서도 밀어내는 데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통신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무거움이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 믿게 되면, 화재에 대비한 스프링클러도 거추장스러워 보이고 케이블을 유지하고 복구하는 인력도 쓸데없어 보인다.

통신에 필요한 무거운 것들을 잊을 때 우리는 한번 연결된 것은 영원히 연결된 것이라고 착각한다. 손가락 끝으로 화면을 터치하면 모든 것을 주문할 수 있고, 카드 하나만 들고 있으면 모든 것을 결제할 수 있다는 착각이다. 우리가 손가락을 대거나 카드를 꽂는 동안에도 누군가 케이블을 깔고 점검하기 위해 땅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게 바닥에 깔린 채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케이블과 사람이 이번 화재를 통해 비로소 드러났다. 이른바 ‘초연결사회’는 이들이 가까스로, 위태롭게 지탱해왔던 것이다.

화재 이후의 혼란 속에서 많은 사람이 통신 인프라 없이는 신용카드가 무용지물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절감했다. 신용카드는 지폐와 동전이 든 지갑보다 가벼울지 몰라도, 신용카드 결제 한건을 처리하는 데에는 엄청난 무게의 전선과 서버가 필요하다. 지폐는 한 사람의 손에서 다른 사람의 손으로 옮겨지는 것만으로 거래를 성사시키지만, 신용카드는 그것이 정당하고 유효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전기신호가 땅속의 케이블 더미를 한바퀴 돌고 와야 하기 때문이다. 신용카드는 겉보기보다 훨씬 복잡하고 무거운 기술이다.

이에 비해 지폐는 지갑을 무겁게 만들긴 하지만 거래를 할 때마다 거창한 인프라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가벼운 기술이다. 지폐에도 위변조를 막기 위한 첨단 디지털 기술이 필요하지만 일단 사용자의 손에 들어간 지폐는 인프라에 의존하지 않고 작동한다. 화재나 지진으로 주변 세계와 시스템이 손상된 상황에서도 사람이 지폐를 들고 움직이면 여전히 필수적인 거래를 해결할 수 있다. 지폐는 느리지만 확실한 기술이다.

디지털 통신 기술은 복잡하고 불안하니 단순하고 정감 있는 아날로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어떤 기준으로 시스템을 설계하고 관리하고 사용할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전면에 부각되는 빠름과 효율의 가치에만 주목하면 뒤에 서 있다가 위기의 순간에 묵묵히 일을 해내는 견고한 기술을 간과하게 된다. 2019년에 나온다는 5G 스마트폰은 분명 1969년 아폴로 우주선을 달로 데려간 컴퓨터와 통신 장비보다 빠르고 강력하겠지만, 닐 암스트롱과 동료들이 목숨을 의지할 만큼 견고하거나 신뢰할 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스템이 지향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현국사 화재가 보여주었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시스템만이 아니라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시스템, 최악의 상황에서도 근근이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화재 한건 때문에 응급 전화를 걸 수 없게 되고 병원 내부 연락이 어려워지고 기본적 경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는 시스템은 우리 삶을 떠받친다는 ‘인프라’의 정의를 배반한다.

우리는 인프라가 눈부신 활약을 하기보다는 무겁게 제자리를 지켜주기를 기대한다. 이는 인프라가 절대 망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사고와 고장에 대비해서 언제라도 달려올 수 있는 경험 많은 사람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신용카드와 지폐를 섞어 쓰듯이 한 부분이 무너졌을 때 그것을 보완하고 대체할 수 있는 수단과 통로를 만들어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영화 내려받기 속도만이 아니라 견고성, 신뢰성, 공공성으로 기술과 인프라를 평가하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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