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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2.27 17:48 수정 : 2018.12.27 19:05

다음 김용균을 막으려면 무인화가 아니라 ‘유인화’가 필요하다. 기계가 필요한 곳에 기계를, 사람이 필요한 곳에 사람을 둘 줄 알아야 한다. 단순히 사람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대접을 해가며 사람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미국의 에스에프(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1940년대 발표한 작품들에서 제시한 로봇공학 삼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로봇은 인간을 해치거나 인간이 해를 입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둘째, 로봇은 첫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인간이 내리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 로봇은 첫째와 둘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이것은 로봇이 인간을 섬기는 하인처럼 일하면서도 그 나름의 자율과 권리를 가지고 존재하기 위해 지켜져야 할 가상의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 속 로봇은 첫째와 둘째 원칙이 충돌하거나 둘째와 셋째 원칙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종종 딜레마에 빠진다. 특히 셋째 원칙은 갈등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로봇이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지키려 하거나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순간 까다로운 문제가 생겨난다.

태안의 화력발전소에서 설비를 점검하다가 기계에 몸이 빨려 들어가 목숨을 잃은 김용균씨와 아직 살아남아 그 일을 하고 있는 동료들은 아시모프 소설에 나오는 로봇보다 못한 존재인가. 그들은 마치 기계를 섬기는 하인처럼 일하면서도 아시모프가 로봇에 부여한 만큼의 권리도 얻지 못했다. 김용균씨처럼 기계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메인테이너(maintainer)들은 로봇과 비슷하게 첫째와 둘째 원칙을 따라 기계를 위해 일한다. 메인테이너들은 절대 기계에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하고, 끝없이 돌아가는 기계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인용할 수 있는 셋째 원칙은 유명무실하다. 그들은 기계를 지키고 기계에 복종하다가 미처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고 기계로 빨려 들어간다. 인간 메인테이너에게는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알리고 피할 수 있는 자율, 즉 아시모프의 로봇만큼의 자율도 허락되지 않는다.

김용균씨와 그의 동료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원칙이란 가령 위험한 일을 21조로 하게 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기계에 몸이 걸렸을 때 다른 한 사람이 기계를 멈추는 코드를 당길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기계를 소유하고 기계에서 이득을 얻는 사람들은 그런 필요를 인정하지 않았다. 메인테이너가 셋째 원칙에 따라 자기 자신을 보호할 권리를 박탈한 것이다. 메인테이너들은 기계 앞에서 또 기계를 가진 사람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존재가 되었다. 첫째와 둘째 원칙의 엄중함에 눌려 메인테이너는 셋째 원칙을 입 밖으로 내보지도 못한다. 일년 전에 역시 혼자 일하다 기계에 끼여 숨진 이민호씨가 남긴 한명 더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은 아직 어디에도 가닿지 못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데, 젊은이들은 자꾸 1차 산업혁명 때처럼 죽어나간다. ‘사람 중심 제조 혁신’을 하는 ‘스마트 공장’ 시대가 왔다는데, 공장 안에서 사람이 죽어도 알지를 못한다. 19세기 영국 공장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방적기 밑으로 떨어진 실을 줍거나 끊어진 실을 이어 붙이는 일을 하던 아이들처럼, 2018년 한국에서도 젊고 약한 이들이 발전소 컨베이어 벨트 밑으로 몸을 집어넣어 석탄 부스러기를 치운다. 부모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자식을 ‘살인 병기’에 빼앗긴다(김용균씨 어머니).

다음 김용균을 막으려면 아예 사람이 위험한 일을 할 필요가 없도록 모든 작업을 무인화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계 옆에서 일하고 먹고 자는 사람들은 그 말이 공허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 없이 돌아가는 공장은 일론 머스크의 상상이나 평행 우주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다음 김용균을 막으려면 무인화가 아니라 ‘유인화’가 필요하다. 기계가 필요한 곳에 기계를, 사람이 필요한 곳에 사람을 둘 줄 알아야 한다. 단순히 사람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대접을 해가며 사람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문재인 정부가 표방했던 ‘사람 중심 과학기술’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의 출발점이어야 하지 않는가.

김용균씨 같은 메인테이너들에게 아시모프의 로봇만큼의 자율과 권리라도 보장하자. 위험한 것을 위험하다고, 망가진 것을 고쳐달라고 소리내어 말할 수 있도록 하자.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곳에는 혼자 들어가지 못하게 하자. 죽음의 위협을 느낄 때에는 기계를 멈출 수 있도록 하자. 메인테이너들에게 사람대접을 못하겠거든 로봇 대접이라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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