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지난 며칠 동안 틈틈이 ‘김용균 보고서’를 읽었다. 정확한 제목은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조사결과 종합보고서’다. 김용균씨는 지난해 12월10일 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석탄을 나르는 컨베이어를 점검하는 작업 중 벨트와 롤러 사이에 몸이 끼여 들어가는 사고로 숨졌다. 보고서는 그 죽음의 이유를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고인은 왜 운전 중인 벨트컨베이어 밀폐함의 점검구 안으로 상체를 집어넣고 작업을 해야 했을까? 개인의 의욕이 넘친 과잉행동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구조적인 원인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것은 김용균이라는 한 젊은이의 죽음에 대한 질문이자, 김용균 이전에 죽은 이들과 김용균 이후에 죽고 있는 이들에 대한 질문이다. 무엇이 그들의 몸을 그토록 큰 힘으로 눌렀는지, 그 힘은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것이다. 보고서는 물리적인 기계의 힘과 추상적인 구조의 힘이 어떻게 동시에 노동자의 몸에 작용하는지를 치밀하게 보여준다. 발전소는 단지 크고 빠른 기계가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 아니며, “오랜 기간 동안 발전소가 위험하도록 ‘구조화’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용균의 몸은 기계에 눌리는 동시에 발전 산업의 왜곡된 구조에 눌렸다. 외주화라는 산업 구조의 문제가 어떻게 개인의 몸에 대한 물리적인 위험을 증가시키는가? 수평 방향으로 흐르던 석탄 컨베이어 계통을 분할하여 일부를 외주화하면, 그 절단면은 수도관 양쪽을 이어 붙이듯 쉽게 봉합되지 않는다. 절단 지점에서는 일을 맡기는 발전사와 일을 맡은 협력사 사이에 수직 방향의 위계가 형성되고, 석탄이 절단면 사이를 수평 방향으로 이동하려면 반드시 그 절단면을 둘러싼 조직 간의 수직적 관계를 경유해야만 한다. 이 지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공백과 새로운 작업이 생겨난다. 보고서는 이런 수평과 수직의 힘이 부대끼는 공간에서 “새로운 위험이 증식”한다고 지적한다. 수직의 힘은 수평의 흐름과 얽혀 돌아가면서 사람을 옥죈다. 아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점검하는 컨베이어에 대한 권한이 없다. 위에서 아래로 보내는 카카오톡 작업 지시 메시지는 사람을 컨베이어 앞으로 몰아가지만, 아래에서 위로 보내는 설비 개선 요청은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한다. 2017년 제주에서 공장 실습을 하던 고등학교 3학년 이민호군이 “한명 더 부탁드립니다”라고 보낸 카톡 메시지에 아무도 답하지 않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런 비대칭적 수직 방향의 힘에 눌린 노동자가 수평으로 흐르는 컨베이어와 석탄에 밀려 쓰러진다. ‘김용균 보고서’는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작업자 과실론’을 꼼꼼하게 논박한다. 김용균이 매뉴얼에 없는 일, 즉 벨트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는 과실을 범했다고 설명하는 대신, 그가 정식 작업공정에 없는 “좀비 공정”, 즉 설비의 이상 부분을 근접 촬영해서 보고하는 일을 하도록 만든 구조에 주목한다.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기계장치와 인간, 화학 물질과 인간의 관계에서 위험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구조하에서 작동하는 기계와 투입되는 노동력, 특정 구조하에서 사용되는 화학 물질과 인간의 관계가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기술-사회의 관계에 대한 교과서에 들어갈 법한 구절이다. 또한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와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설명하는 데에도 유용한 관점이다.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힘의 구조 속에서 인간과 기계장치가 맺는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지침에 가장 충실하게 따랐던 고인을 스스로를 죽인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역설”을 막을 수 있다. 기계에 몸이 끼여 사람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도 새롭게 생각할 수 있다. 대법관을 지낸 김지형 위원장은 보고서의 서문을 기도로 끝맺었다. “위원회는 진정 우리 사회의 노동 안전을 향한 위원들 모두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이 보고서를 펴냅니다. 부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의 기도가 신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그의 기도는 법과 규정을 만드는 힘을 가진 이들, 기계와 사람을 맘대로 배치할 힘을 가진 이들, 그리고 김용균의 죽음을 곧 잊게 될 우리를 향하고 있다. ‘김용균 보고서’가 응답 없는 기도로 끝나도 우리는 괜찮을 것인가.
칼럼 |
[전치형, 과학의 언저리] ‘김용균 보고서’를 읽고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지난 며칠 동안 틈틈이 ‘김용균 보고서’를 읽었다. 정확한 제목은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조사결과 종합보고서’다. 김용균씨는 지난해 12월10일 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석탄을 나르는 컨베이어를 점검하는 작업 중 벨트와 롤러 사이에 몸이 끼여 들어가는 사고로 숨졌다. 보고서는 그 죽음의 이유를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고인은 왜 운전 중인 벨트컨베이어 밀폐함의 점검구 안으로 상체를 집어넣고 작업을 해야 했을까? 개인의 의욕이 넘친 과잉행동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구조적인 원인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것은 김용균이라는 한 젊은이의 죽음에 대한 질문이자, 김용균 이전에 죽은 이들과 김용균 이후에 죽고 있는 이들에 대한 질문이다. 무엇이 그들의 몸을 그토록 큰 힘으로 눌렀는지, 그 힘은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것이다. 보고서는 물리적인 기계의 힘과 추상적인 구조의 힘이 어떻게 동시에 노동자의 몸에 작용하는지를 치밀하게 보여준다. 발전소는 단지 크고 빠른 기계가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 아니며, “오랜 기간 동안 발전소가 위험하도록 ‘구조화’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용균의 몸은 기계에 눌리는 동시에 발전 산업의 왜곡된 구조에 눌렸다. 외주화라는 산업 구조의 문제가 어떻게 개인의 몸에 대한 물리적인 위험을 증가시키는가? 수평 방향으로 흐르던 석탄 컨베이어 계통을 분할하여 일부를 외주화하면, 그 절단면은 수도관 양쪽을 이어 붙이듯 쉽게 봉합되지 않는다. 절단 지점에서는 일을 맡기는 발전사와 일을 맡은 협력사 사이에 수직 방향의 위계가 형성되고, 석탄이 절단면 사이를 수평 방향으로 이동하려면 반드시 그 절단면을 둘러싼 조직 간의 수직적 관계를 경유해야만 한다. 이 지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공백과 새로운 작업이 생겨난다. 보고서는 이런 수평과 수직의 힘이 부대끼는 공간에서 “새로운 위험이 증식”한다고 지적한다. 수직의 힘은 수평의 흐름과 얽혀 돌아가면서 사람을 옥죈다. 아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점검하는 컨베이어에 대한 권한이 없다. 위에서 아래로 보내는 카카오톡 작업 지시 메시지는 사람을 컨베이어 앞으로 몰아가지만, 아래에서 위로 보내는 설비 개선 요청은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한다. 2017년 제주에서 공장 실습을 하던 고등학교 3학년 이민호군이 “한명 더 부탁드립니다”라고 보낸 카톡 메시지에 아무도 답하지 않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런 비대칭적 수직 방향의 힘에 눌린 노동자가 수평으로 흐르는 컨베이어와 석탄에 밀려 쓰러진다. ‘김용균 보고서’는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작업자 과실론’을 꼼꼼하게 논박한다. 김용균이 매뉴얼에 없는 일, 즉 벨트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는 과실을 범했다고 설명하는 대신, 그가 정식 작업공정에 없는 “좀비 공정”, 즉 설비의 이상 부분을 근접 촬영해서 보고하는 일을 하도록 만든 구조에 주목한다.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기계장치와 인간, 화학 물질과 인간의 관계에서 위험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구조하에서 작동하는 기계와 투입되는 노동력, 특정 구조하에서 사용되는 화학 물질과 인간의 관계가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기술-사회의 관계에 대한 교과서에 들어갈 법한 구절이다. 또한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와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설명하는 데에도 유용한 관점이다.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힘의 구조 속에서 인간과 기계장치가 맺는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지침에 가장 충실하게 따랐던 고인을 스스로를 죽인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역설”을 막을 수 있다. 기계에 몸이 끼여 사람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도 새롭게 생각할 수 있다. 대법관을 지낸 김지형 위원장은 보고서의 서문을 기도로 끝맺었다. “위원회는 진정 우리 사회의 노동 안전을 향한 위원들 모두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이 보고서를 펴냅니다. 부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의 기도가 신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그의 기도는 법과 규정을 만드는 힘을 가진 이들, 기계와 사람을 맘대로 배치할 힘을 가진 이들, 그리고 김용균의 죽음을 곧 잊게 될 우리를 향하고 있다. ‘김용균 보고서’가 응답 없는 기도로 끝나도 우리는 괜찮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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