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인의 책탐책틈
저자에게는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기자 출신의 소설가라 하면 자동적으로 김소진을 떠올리게 된다. 꽤 오랫동안 유력 일간지의 성실한 기자로 일했고, 전업작가로 전환 후 더 성실하게 소설을 썼다는, 혹은 쓰고 있다는 점에서도 장강명은 김소진과 닮았다. 저자에게 또 한번 실례를 범하자면, 그래서 장강명을 읽다 보면 김소진을 읽을 때와 지금을 자꾸 비교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김소진의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마지막, 기자가 전화로 기사를 송고하는 장면이다. 김귀정 열사의 시신이 안치된 백병원에서 실족사한 밥풀떼기 박상선에 대한 사건사고 기사. “백병원 앞의 저동 건물 신축 공사장에서 박상선 씨, 괄호 열고, 이십팔 무직 주거 부정, 괄호 닫고,가 이 건물 지하 사층 바닥에 떨어져 이마 등에 피를 흘리고 숨져 있는 채 발견됐다.” 건조하게 열리고 닫힌 ‘괄호’와 그 ‘괄호’ 바깥에서 요동치는 이야기들이 있었기에 기자와 소설가의 글쓰기가 공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장강명의 소설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장강명을 읽다가 김소진을 떠올린 것은 기자 출신이라는 공통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국이 싫어서>의 후기에 기록된 빼곡한 참고자료들. 인터뷰와 블로그와 인터넷 사이트의 주소들로 이루어진 참고자료 목록이 기자형 글쓰기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해 주었다. 통상 약간의 감상적인 소회나, 소설 쓰기의 고단함, 혹은 주변의 지인들에게 보내는 인사 등등으로 채워지기 마련인 ‘작가의 말’은 한 치의 사적인 감상도 없이 소설에 스며든 취재원들을 하나하나 호명하고 있다. 그것이 또 다른 방식의 ‘괄호 열고’, ‘괄호 닫고’라고 느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무수한 밥풀떼기들의 하룻밤을 바탕으로 한 3인칭이었다면, <한국이 싫어서>는 1인칭 반말투의 소설이다. <열광금지, 에바로드>의 종현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기자에게 사실은 3인칭으로, 감상이나 견해는 1인칭으로 써달라는 조건을 분명히 제시한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1인칭으로 말해져야 할지, 3인칭으로 말해져야 할지를 분명히 아는 똑똑한 청년들에게 한국 사회라는 괄호는 너무 좁다. 그리고 그 괄호가 감당하지 못하는 삶의 욕망들이 괄호 밖에서 넘쳐난다. 계나가 6년 만에 얻은 호주 시민권이나 종현이 완성한 에바로드 다큐멘터리가 괄호 밖 어디쯤에서 얻은 소설의 세계라면, ‘헬조선’·‘현시창’은 여전히 그들이 살고 있는 괄호 안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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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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