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인의 책탐책틈
화산도김석범 지음, 김환기·김학동 옮김/보고사(2015) 김석범의 <화산도>가 번역 완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방학 때마다 <화산도> 완독을 계획했다. 그러나 원고지로 2만매가 넘는 분량의 대하소설을 한 호흡에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계획의 완수는 계속 유보되었다. 덕분에 단속적으로 소설 안에 머물면서 이 소설의 함의를 간간이, 오래 생각할 수 있었다.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날은 제주 4·3이 일어난 지 69년째를 맞는 날이기도 하다. 작가 김석범은 현재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도 매우 적은 수만 남아 있는 조선적(朝鮮籍) 보유자이다. 일본 패망 이후 일본에 주둔한 연합국총사령부(GHQ)는 당시 일본에 남아 있던 조선인 체류자들에게 ‘조선’이라는 국적을 임시로 부여했다. 제국 일본의 청산으로 인해 당시 일본의 국민이었던 구식민지 호적보유자에게 돌려줄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 1953년 7월 휴전협정으로 남북이 분단된 이후 ‘조선’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므로 조선은 없는 나라이고, 이들은 실질적으로 무국적자이다. 전범국가인 일본, 또는 분단된 국가의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무국적자로 남았다. 망각해서는 안 될 반인류적 야만과 폭력을 증명하고, 원폭으로 끝난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국민국가의 정체성에 반대하는 개인들의 의지와 존엄이, 없는 국가의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선명해진다. 조국이라는 거대한 무게의 상징은 적어도 이들에게 임의로 국적을 부여하고, 그 선택의 여부에 따라 차별과 배제가 수행되는 방식으로 채워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조선’이라는 없는 나라의 국적은 강제로 귀속된 국가에서 유린당하고 파괴당한 삶의 상처를, 그리고 그 과거에 대한 반성도 책임도 없이 새로 만들어진 국가들의 부당함을 기억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겨울 내내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를 함께 외치면서도 무언가 개운치가 않았다. 부패한 행정부와 거기에 결탁한 세력들이 저지른 죄과에 ‘나라’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곧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의한 적 없으나, 암묵적으로 통용되면서 자행된 국가 권력의 부패에 맞서 내가 주장할 ‘국가’의 실체가 새삼스럽게 암연했다. 실체 없는 국가에 대한 오해와 과신을 이겨낼 근거를 찾기에 내 삶은 여전히 빈약하고 거기에 대해 나는 생각보다 훨씬 무지했다. 이번 방학에도 완독하지 못했던 <화산도>를 다시 펼쳐 읽는다. 취재를 위한 입국마저 허용받지 못한 채, 오랜 시간 일본에서 제주 4·3을 기록했던 작가의 시간을 생각한다. 적어도 그에게 국가란 신생 재활 국가의 정체성을 수립한다는 명분으로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국가란 내 이웃과 내 가족, 그리고 선조와 후배들의 삶으로부터 약속된 가치와 존엄이 지켜져야 하는 합의체이자 공동체일 것이다. <화산도>는 부정의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그런 국가에 대한 방대한 기록이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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