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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7.06 18:56 수정 : 2017.07.06 19:05

서영인의 책탐책틈

연대기, 괴물
임철우 지음/문학과지성사(2017)

아연 소년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문학동네(2017)

도쿄를 여행했을 때 신주쿠 역에서 만났던 극우단체의 선동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검은 승합차에 걸린 욱일기나, “조선인은 한국으로 돌아가!” 따위의 구호가 휘갈겨진 현수막은 지나치게 크고 붉고 거칠었다. 차의 지붕에 달린 확성기는 차체에 비해 너무 컸고,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발언들은 비현실적일 만큼 격앙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서울에서도 그런 광경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종로나 광화문 쪽에 가면 엄청나게 크고 격앙된 목소리로 종북척결을 외치는 이른바 애국보수들을 흔하게 만난다. 우리도 남부럽지 않은 혐오문화의 국가가 되어 가고 있는 걸까. 태극기는 점점 혐오의 상징이 되고 있다.

<연대기, 괴물>에서 가장 섬뜩했던 장면은 송달규가 정부청사 앞에서 과거 베트남 파병 당시의 중대장을 만나는 장면이다. 노인이 된 중대장은 군복을 갖춰 입고 낡은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혼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치고 있었다. 전쟁의 망령이다. “베트콩 빨갱이는 얼마든지 죽여도 좋다”를 입에 달고 살았던 중대장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 시절을 살고 있다. 베트콩이 아니더라도 그의 환상 속에는 여전히 죽여도 좋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중대장이거나 세월호 시위 현장에 출몰한 서북청년단이거나 모두 전쟁이 낳은 괴물이며 지속되는 전쟁의 증거물이다. 살육이 애국으로, 정의와 질서로, 국익으로, 훈장으로, 어떤 명분과 보상으로 교환되는 한, 전쟁의 참혹과 비탄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그렇게 교환한 명분들 아래에서 누군가는 죽여도 좋은, 무시하고 모욕해도 상관없는 존재가 된다.

“나는 평화주의자들이 정말 싫어. 당신이 완전군장을 하고 산에 올라 봤어? 아니면 영상 50도가 넘는 날씨에 장갑수송차에 타보기를 했어?” “아니겠지… 아니지… 그러니까 우리를 건드리지 마!”

<아연 소년들>에서도 같은 목소리를 만난다. 전쟁이 허용했던 잔혹을 다른 보상으로 교환하기 위해 그 잔혹의 진실을 억압하고, 진실의 증언을 혐오하는 목소리. 작가가 전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여성’들의, 그리고 <아연 소년들>에서 ‘소년병’들의 증언을 기록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명예와 애국과 훈장의 세계에 진입할 수 없는 사람들, 보상도 교환도 없는 곳에서 끔찍한 기억과 훼손된 신체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혹은 차마 그 참혹한 기억을 다른 것으로 교환할 수 없었던 사람들. 기억은 제각각이고 전쟁에서 돌아온 후의 삶도 제각각이지만 그들은 한목소리로 버릴 수 없는 기억의 고통을 호소한다. 언제나 약자들만이 평화를 말한다.

평화는 전쟁의 반대말일까. 전쟁이 끝나면 평화는 오는 것일까. 생존을 위해서 불가피했다고, 죽고 죽이면서 사는 게 당연하다며, 세상은 여전히 전쟁 중이다. 죄책과 영예와 자부와 혐오의 연쇄 속에서 우리는 전혀 평화롭지 않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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