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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12 19:52 수정 : 2018.04.12 20:00

서영인의 책탐책틈

스크류바
박사랑 지음/창비(2017)

‘패러디’는 풍자, ‘오마주’는 존경. 그리고 또 있다. 이른바 ‘상호텍스트성’. 기존의 텍스트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원전과는 다른 맥락을 형성해 내는 것. 새로운 것의 창조가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이미 만들어진 텍스트의 세계 안에 갇혀 있음을, 그리하여 창조의 강박 대신 차용과 재해석의 자유를 누리려는 태도 같은 것도 포함될 수 있다. 그리고 박사랑의 <스크류바>를 통해 이와 같으면서도 다른 문학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이 방법은 우선 문학에 주어진 ‘후광’을 확실히 제거하면서 시작한다. 영리한 사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천운으로 중견기업에 입사했지만 입사 후에는 그저 밀려나지 않기 위해 매달려 있는 것이 삶의 전부이다. “매일 내가 서 있는 곳은 부채의 사북자리였고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이었다.”(‘#권태_이상’) 굳이 각주를 달지 않아도 독자들은 안다. ‘사북자리’가 최인훈의 <광장>에 등장하는 유명한 상징이며,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이란 이육사의 ‘절정’이 절박하고 삼엄한 현실을 비유하기 위해 상상한 장소라는 것을. 소설에서 ‘사북자리’와 ‘고원’은 인물의 삶이 그만큼 절박하게 궁지에 몰려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것일까. 아니, 정확히 그 반대다. ‘사북자리’와 ‘고원’이 일상에 투입되는 순간, 그 심오하고 장엄한 문학적 비유조차 시들해진다. 지루하고 무기력하고, 그런데 위협적인 생존의 현장에서 문학이 혼자 오롯할 재간이 있나. 맥락은 순식간에 바뀐다. 후광이 빠진 문학은 텍스트에 뒤섞여 삶의 존엄 같은 것을 사색할 여지 따위 도무지 어디에도 없는 일상을 나뒹군다.

문학이 척박한 삶이 빠져나갈 구멍이었다면, 그러나 그 구멍조차도 여지없이 세속화되었다면, 다른 편에는 인스타그램과 해시태그가 있다. 여유로운 휴가와 일상을 벗어난 맛을 즐기는 사진들이 색과 빛의 보정을 거쳐 에스엔에스(SNS) 공간에 올려질 때, 그리고 누군가가 거기에 ‘좋아요’를 누를 때, 우리의 삶은 지루한 권태를 벗어나 주목받는 주인공으로 잠시 반짝이는 것도 같다. 그러나 나름 여행 작가인 ‘매앵’에게는 이 사치의 전시조차도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여행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전시해야 독자들은 ‘매앵’의 감각을 선망하며 책을 살 것이다. 정말이지,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물론 알고 있다. 후광이 없어도 문학은 문학이며, 여기에서 문학은 매일이 전쟁인 일상을 잠시라도 끊어내는 숨돌림 같은 것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인스타그램의 자기전시는 자기위안이며 또한 자기기만이기도 하다. 그래도 외면이나 도피가 아니냐는 의혹보다는 이 신박하고 흥미로운 문학사용법에 주목해 보고 싶다.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으로부터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까지, <스크류바>가 사용하는 문학의 목록은 다채롭다. 이미 만들어진 텍스트의 성벽에 둘러싸여, 자신의 삶조차도 끊임없이 텍스트로 연출하는 세대에게 문학이 의외의 쓸모를 발휘한다. 그리하여 문학도 삶도 문득 다르게 보인다. 이런 식으로 “의지 없이, 생각 없이, 희망 없이 삼무 정신으로”(‘#권태_이상’), 후광 없는 문학에 기대어, 성찰이라는 것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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