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7.03.24 16:56 수정 : 2017.03.24 20:49

[토요판] 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런던 보이스

오늘은 아련한 추억담을 하나 얘기해보겠다. 시간을 30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 중학교 때. 내가 다녔던 중학교에서 국제아트캠프라는 행사에 참여했다. 국제아트캠프는 세계 각국의 청소년들이 모여 그 나라만의 개성 있는 예술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행사였다. 학교 대표로 몇명의 학생들을 보내야 했다. 매년 개최지가 달라지는데 그해는 일본이었다.

행사의 특성상 당연히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을 선발해서 보내야 했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일찌감치 학생 대표단을 정해놓았다. 전교학생회장인 나, 그리고 부회장. 육성회장 아들. 마지막으로 어머니회 회장 아들. 헐! 예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네 명이 졸지에 아트캠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나는 피아노라도 조금 쳤지, 심지어 어머니회 회장 아들 녀석은 예술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영어로 아트(art)라고 쓴다는 것 정도밖에 없는 빙상부였다!

어쨌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예술 특기생들로 둔갑한 우리들은 그런 척이라도 해야 했다. 학교에서 정한 공연 내용은 사물놀이. 우리 넷은 각각 악기를 하나씩 맡았다. 육성회장 아들은 북, 어머니회 회장 아들은 징, 전교 부회장은 꽹과리, 그리고 나는 장구. 그리고 맹연습에 돌입했다.

우리는 매일 방과 후 음악실에 모여 사물놀이 연습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 장구를 쳐봤다. 어릴 때부터 뭐든 열심히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던 터라, 나는 김덕수가 된 기분으로 사물놀이에 몰두했다. 덩기덕 쿵덕, 덩기덕 쿵더러러럭. 힘이 들 때면, 또는 가끔 징이나 치는 친구가 부러울 때면 꽹과리를 치며 상모도 돌려야 하는 부회장 녀석을 보며 위안을 삼았다.

사실 내가 준비하고 싶었던 무대는 따로 있었다.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유로댄스에 맞춰 단체로 춤을 추는 것. 그때 고른 음악이 바로 런던보이스의 ‘할렘 디자이어’였다. 그러나 내 제안은 선생님에 의해 무참히 거부당했고 결국 우리는 소년 사물놀이패로 둔갑한 채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긴장과 우려와 달리 아트캠프는 신세계였다. 해외 각국에서 온 미소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야호!

열흘이 넘는 행사 기간 중에 초반 일주일은 각국 대표단 학생들이 같은 유스호스텔에서 함께 지내면서 친목을 다지는 기간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유전적으로 망설임과 부끄러움을 담당하는 유전인자가 결여된 나는 도착하자마자 활발한 사교활동을 시작했고 이틀 만에 뉴질랜드에서 온 금발 소녀 케이트에게 반해버렸다.

핸드폰은 고사하고 디지털카메라도 없던 1990년, 똑딱이 카메라로 수도 없이 사진을 찍고 배지를 주고받고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케이트가 ‘굿 루킹’이라고 칭찬해준 말에 자신감이 도쿄 하늘을 찌른 나는 그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더욱 장구 연습에 매진했다.

며칠 후, 드디어 각국 학생대표들이 공연을 펼치는 시간이 찾아왔다. 민속춤, 악기 연주, 재즈 댄스, 심지어 간단한 서커스까지 정말 대단한 무대가 펼쳐졌다. 가짜 예술학도들인 우리 넷은 사물놀이 악기를 들고 무대 뒤에서 떨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고 행사 사회자의 영어 소개가 이어졌다. 우리 넷의 간단한 프로필을 영어로 얘기해주는데, 내 소개를 듣고 무릎이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쟁구 지니어스 프럼 코리아! 제이크 리!”

그렇다. 쟁구 지니어스. 그게 나였다.

나는 장구를 치면서 내내 멍하고 부끄러웠다. 전세계의 소녀들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런던보이스 형님들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싶었는데,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런던보이스는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을 휩쓸었던 유로댄스의 상징과도 같은 그룹이다. 그 인기에 비해 알려진 사실들은 극히 적다. 에뎀 에프라임과 데니스 풀러라는 59년생 동갑내기로 결성된 댄스 듀오. 1986년에 결성되어 1988년에 1집을 히트시키고 금방 사라졌다. 비록 활동기간은 짧았지만 그들의 데뷔 앨범은 단연코 유로댄스 최고의 명반이다. ‘할렘 디자이어’, ‘런던 나이츠’, ‘마이 러브’ 등등 수많은 히트곡을 담고 있다. 언제나 활짝 웃는 얼굴로 춤을 추던 런던의 소년들은 어이없게도 음주운전 차량에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둘이 함께.

요즘도 유로댄스를 가끔 찾아듣는다. 헤비메탈로도 스트레스가 안 풀리고, 힙합으로도 기분이 뜨지 않을 때, 나의 마지막 선택은 유로댄스, 그중에서도 런던보이스다. 환한 얼굴로 소위 토끼춤을 깡충깡충 추던 두 형님들의 모습이 아련하다. 오늘의 추천곡은 ‘아임 고나 기브 마이 하트’.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