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2.01 15:03
수정 : 2017.12.02 18:31
|
‘홍콩 4대 천왕’들. 한겨레 자료 사진
|
|
‘홍콩 4대 천왕’들. 한겨레 자료 사진
|
딱 그 시대에만 쓰이고는 용도 폐기되는 표현들이 있다. ‘홍콩 보내준다’는 말도 그중 하나. 대략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에 꽤나 들었던 것 같은데 용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좁게는 이성에게 오르가슴을 느끼게 해주겠다는 뜻으로 쓰였다. 연인끼리는 자신감의 표현이자 짜릿한 밤으로 이어지는 속삭임이었겠지만 종종 성희롱의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넓게는 기분을 좋게 해주겠다는 뜻으로도 쓰였다. 놀이공원에서 신나게 놀다 나온 아이들이 ‘와 완전히 홍콩 갔다 왔네’라고 말하는 식.
왜 뉴욕이나 도쿄가 아니라 홍콩이었는지, 누가 어디서 이런 표현을 제일 먼저 썼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시절 홍콩이라는 곳이 우리에게 선망이 대상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해외여행을 마음대로 갈 수 없었던 엄혹한 시기였기에 모든 외국의 도시가 다 미지의 땅이었지만 홍콩은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중국 땅이지만 영국령이었던 곳, 세기말 (1997년)에 중국으로 반환이 예정된 시한부의 도시,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뒤섞인 혼혈의 도시. 홍콩은 여러모로 도무지 알 수 없는, 불치병에 걸린 아리따운 연쇄살인마 소녀 같은 매력을 풍기는 도시였다.
우리나라에서 홍콩 영화의 인기는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았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이소룡과 성룡으로 이어지는 무협영화들이 대표주자였다. 영화의 내러티브보다는, 걸출한 무예인이기도 한 배우들의 액션에 기대는 영화들은 세계 영화 사상 유일무이한 개성을 뽐내며 승승장구했다. 홍콩 영화 하면 ‘아뵤!’라고 외치며 주먹이나 쌍절곤을 휘두르는 장면이 바로 연상되는 식. 그러나 1986년에 오우삼이 <영웅본색>이라는 영화를 선보이면서 홍콩 영화는 새로운 전기로 접어든다. 이른바 홍콩 누아르. <영웅본색> 시리즈에 이어 <첩혈쌍웅>, <천장지구> 등이 대표작이다. 모든 성공한 영화들이 그러하듯, 이 영화들은 영화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당시 대중문화와 청소년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꼬마 아이들까지 영화 주인공들을 따라 괜히 성냥개비를 물고 다니거나, 요즘 롱패딩이 유행하듯 검은 롱코트가 학원가를 휩쓸었고, 청카바 패션이 대유행하곤 했다. 청카바가 뭐냐고? 청재킷을 생각하면 되는데, 아무도 청재킷이나 청커버라는 말은 안 쓰고 ‘청카바’라고 불렀다. 지금 맞아 맞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면 아재 인증.
이 시절 홍콩에는 너무나도 멋진 오빠 네 명이 있었다.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여명. 중후한 남성미를 풍기는 큰 형님 주윤발, 언제나 소년 같고 결국 소년으로 영원히 남은 고 장국영, 꽃미남 반항아 유덕화, 부드러움의 끝판왕 여명. 그들의 개성은 확연히 달라서, 저마다 우리 오빠가 더 멋있다며 핏대를 올리는 여학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유덕화의 팬이어서 <천장지구>를 열 번은 본 것 같다. 볼 때마다 울었다는 사실은 안 비밀. 이
네 명이 오늘 칼럼의 주인공은 아니다. 사실 이
네 명을 홍콩 ‘4대 천왕’으로 알고 있는 분들도 정말 많은데 그렇지 않다. 조금 더 읽어주시길.
홍콩 누아르의 인기는 199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 이어졌다. 1980년대 중반에 오우삼이 등장해 홍콩 영화의 판도를 바꿔놓은 것처럼, 또 다른 천재 감독 한 명이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요즘 20대도 얼핏 이름을 들어봤을 왕가위(왕자웨이) 감독. <열혈남아>, <아비정전> 등으로 기존 홍콩 누아르와 완전히 결이 다른 영화 세계를 선보이던 그는 <중경삼림>이라는 영화로 이중국적 도시 홍콩만의 감수성을 가득 담아낸 ‘왕가위 영화’라는 장르를 만들어낸다. 1990년대 중반, 이른바 청춘의 거리였던 강남역과 압구정 로데오 골목에 매일같이 울려 퍼지던 <중경삼림>의 영화음악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지금 당신의 귓가에 어른거린다면…, 역시 아재 인증.
홍콩 4대 천왕은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한다. 대부분 이런 표현은 팬들 사이에서 만들어져 퍼지는 경우가 많은데, 홍콩 4대 천왕은 달랐다. 거창하기 이를 데 없는 이 표현은 1990년대 초 홍콩 방송가에서 만든 말이다. 앞에서 홍콩 누아르 영화 이야기를 할 때 나왔던 유덕화와 여명을 포함해 장학우, 곽부성까지 묶어 홍콩 4대 천왕이라고 불렀다. 네 명 모두 연기자와 가수 활동을 병행했지만 홍콩 4대 천왕은 어디까지나 가수로서
네 명을 묶는 말.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인기와 지명도 면에서 장학우는 다른
세 명에 비해 현저히 인기와 지명도가 떨어졌다. 나조차도 이름만 알지 그의 노래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이 칼럼을 쓰면서 비로소 찾아 들어봤을 정도니. 그러나 홍콩 현지에서 가수로서의 위치는 장학우가 압도적이어서 홍콩 4대 천왕을 ‘장학우와 아이들’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그 아이가 말하곤 했다. 아…, 그 아이가 생각난다. 새하얀 얼굴에 까만 안경을 얹고 발칙한 말을 잘도 하던 그 소녀.
홍콩 음악에 푹 빠져 있던 한 소녀의 파란만장한 일생, 홍콩의 4대 천왕, 그리고 대만에서 한 소년이 저지른 살인사건이 한데 어우러지는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서 들려드리겠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