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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08 10:59 수정 : 2019.02.10 18:52

빌리 홀리데이.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편에서는 영화 <그린북>과 빌리 홀리데이의 삶을 이야기했다. 오늘은 그의 노래 ‘이상한 열매’의 가사를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해본다. 바로 지금 그 노래를 들으면서 글을 쓴다.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린다지. 잎사귀와 뿌리에 피가 흥건하고, 나무에 매달린 검은 몸뚱이가 바람에 흔들리네. 포플러 나무에 매달린 이상한 열매. 튀어나온 눈과 찌그러진 입술, 그리고 어디선가 살덩이를 태우는 냄새. 비바람을 맞고 까마귀가 뜯어먹으면 슬픈 열매는 나무에서 떨어지네.’

그렇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지. 빌리 홀리데이가 처연하게 부른 이 노래의 주인공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흑인 시체들이다. 영화 <그린북>에서도 나오는 장면이지만 백인들은 종종 흑인을 집단으로 폭행하고 심지어 죽이고 공개적인 장소에 시체를 전시하기도 했다. 남북전쟁이 북쪽의 승리로 끝나고 미합중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해도 소용없었다.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흑인에 대한 폭력과 살인은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대체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니, 식민지도 아니고 자기 나라에서 노예로 부리던 인종에 대해 그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토록 잔혹한 폭력을 이토록 오랜 세월 지속했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에 관해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학설이 있다. 흑인에 대해 백인들이 저지른 길고 긴 세월의 폭력이 ‘성기 콤플렉스’에 기인한다는 이론이다. 황당한 주장처럼 들릴 수 있으나, 저명한 학자들의 논문에서 반복되어 등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흑인 남성의 성기가 백인의 그것보다 확연히 크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혐오하기도 하는 내용의 글은 노예 제도가 유지되던 시절에도 그 후에도 수도 없이 많이 발견된다. 심지어 20세기 들어와서 무려 의학저널에 실린 논문(당연히 백인 의사가 쓴)에서도, 흑인의 성기는 지나치게 크며 그에 따른 리비도 역시 비정상적이어서 주의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발견된다. 즉, 백인 남성들이 나서서 백인 여자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다.

백인 여성을 집적거렸다는 이유로 흑인 남성이 맞아 죽은 사건사고는 그 예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소개하기가 어렵다. 어떤 학자들은 기록이 남아 있는 사건만 해도 책으로 다 묶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다. 대부분 이런 패턴이다. 어떤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에게 성희롱, 혹은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돈다. 다수의 백인들이 모여 차마 묘사하기 곤란할 만큼 잔인한 방법으로 문제의 흑인을 고문하고 죽인다. 그다음에는 시체를 전시하거나 방치하는 식으로 모욕을 준다.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 ‘이상한 열매’에 묘사된 장면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사건들 중 대부분은 오해이거나 고의적인 선동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피해자로 지목된 백인 여자가 재판에서 그런 일이 없다고 증언한 기록도 흔하다. 통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에게 저지른 성폭행보다 그 반대의 경우가 몇배(어쩌면 수십 수백 배)는 더 많으리라 짐작해본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미투(나도 말한다) 운동 사례에서 보듯, 사회 여러 분야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역시 계급과 권력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니까. 신입사원이 여자 부장을 성추행했거나 알바생이 사장을 성희롱했다는 뉴스를 본 적 있나? 연출부 막내가 톱 여배우를 성폭행했다는 뉴스가 있었나?

빌리 홀리데이는 ‘이상한 열매’를 부르기 전에 백인들의 린치를 받을까봐 걱정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백인들에게 여러 번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로서 용기를 내었고, 나중에는 공연을 할 때마다 이 노래를 빼놓지 않고 불렀다. 대중문화사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강준만 교수의 글에 따르면,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 덕분에 실제로 흑인에 대한 린치가 많이 줄어들었단다.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그가 하늘에서라도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쯤에서 난민 포비아로 이야기를 확장해본다. 몇달 전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들어오면서 뜨거운 논쟁이 일었다. 먼저 내가 난민 문제에 관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민들이 들어오면 우리나라 여자들을 마구 성폭행할 것이라는 공포만큼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유럽에서 난민 출신 이주자들이 현지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몇몇 사례를 갖고 공포를 확산시키는 글이 인터넷에 난무한데, 이러지 말자. 심지어는 그 사례들조차 조작된 경우가 여럿 있었던데다가, 난민들이 유독 성범죄를 많이 저지른다는 통계도 없다. 누가 조사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빌리 홀리데이를 잊지 말자. 이상한 열매처럼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흑인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잊지 말자. 두려움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최고의 마취제다. 냉철하게 고민하고 판단해야 할 이슈를 두고 왜 스스로 마취주사를 놓으려고 하는가?

글이 너무 심각해졌는데, ‘이상한 열매’는 역사적 의미를 접어두더라도 무척 좋은 노래다. 한번쯤 들어보시길. 빌리 홀리데이를 처음 들어본다는 초심자들에겐 ‘아임 어 풀 투 원트 유’(I’m A Fool To Want You)를 추천한다. 싸구려 위스키 한잔을 곁들이면 금상첨화겠지. 나는 한잔 더.

에스비에스 피디, 정치쇼 진행자 이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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