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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9 11:01 수정 : 2019.03.31 20:16

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끼’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나온다. ‘연예에 대한 재능이나 소질을 속되게 이르는 말.’ 필자의 정의는 이렇다. 다른 이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재주. 돈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이나 주식시장에 모이듯 연예계에는 끼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그런 연예계에서도 내가 아는 한 최고의 끼쟁이, 자타공인 딴따라 박진영이 오늘 칼럼의 주인공이다.

1972년 1월생이니 생물학적 나이로 보면 우리 아재들의 핵심 계층인 40대 후반 형님이다. 나이 어린 독자들은 제이와이피(JYP)엔터테인먼트의 대표로 그를 제일 먼저 알았겠지만 우리 세대에게 박진영은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가수였다. 외모부터 창법, 춤, 패션까지 가수 박진영은 모든 것이 파격이었다. 너무 파격적이어서 데뷔하기조차 힘들었으나 일단 데뷔를 하자 그의 파격은 시대정신의 바람을 받는 돛처럼 활짝 펼쳐졌다. 시대정신? 댄스 가수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거창한 표현까지 써야 하나 싶지만 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박진영이 데뷔한 1994년의 시대정신, 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20대의 시대정신을 두 단어로 요약하자면 개인과 자유다. 민주화를 향한 열망과 이데올로기 논쟁에 선배들이 몸을 던진 반면, 94학번 새내기들은 집단보다는 개인, 의무보다는 자유를 앞세웠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동지들과 함께하려 했던 선배들과 달리 엑스(X)세대는 어떻게든 남과 다른 개성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알리고 분석하는 기사들이 쏟아졌고 언젠가부터 박진영의 사진이 종종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는 엑스세대의 시대정신을 형상화한 인물처럼 여겨졌다. 이 칼럼에서 서태지를 다룰 때도 시대정신을 언급했는데, 이를테면 서태지와 아이들을 교주처럼 여기며 청소년기를 보낸 아이들이 20대가 되어 만난 엔터테이너가 박진영이라고 하면 적절하겠다.

1990년대 중반. 그러니까 아이엠에프(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불과 이삼십년 전만 해도 아프리카나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들보다 더 가난했던 우리나라가 1994년에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돌파했다. 바로 이듬해 1995년에는 우리나라의 고속성장을 연구하고 ‘기적 만들기’(Making a Miracle)라는 논문을 쓴 로버트 루커스라는 미국 교수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수치로도 학계에서도 성공했다는 인정과 칭찬을 받은 셈이었다. 성공했으니 샴페인을 터뜨려야지. 기적을 일으킨 당사자거나 그들의 아들딸이었던 우리는 축제를 벌였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참 많이들 먹고 마시고 놀았다. 물론 우리 국민들이 너무 놀아서 아이엠에프가 터진 것은 아니다. 아이엠에프 사태의 원인이 기업의 방만하고 부패한 경영과 금융 감독기관의 무능 때문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쨌든 여기저기서 돈이 넘쳐났던 1990년대는 우리 대중문화가 가장 흥청댔던 시기인 동시에 유흥가의 최고 호황이기도 했다. 당연히 나이트클럽의 전성시대이기도 했고 그에 맞춰 댄스 가수들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코요태, 아르이에프(R.ef), 디제이 디오시(DJ DOC), 룰라, 벅, 노이즈, 구피, 클론…. 셀 수도 없는 가수들이 밤마다 클럽의 스테이지를 달궜고 젊은이들은 풍요와 흥분의 거품 속에서 눈과 귀가 먼 채 몸을 흔들어댔고 그 속에 나도 있었다. 빨간 머리, 파란 머리, 보라색 머리. 젊은이들의 머리 색깔이 가장 다양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야타족, 오렌지족, 심지어 낑깡족이라는 가지치기 족들도 등장했다. 낑깡족이 억지라고? 검색해보면 사전에도 떡하니 나온다. 이쯤 되면 엑스세대의 시대정신이 경제호황의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놀 줄 아는, 혹은 놀고 싶어 하는 엑스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박진영은 성공의 바다를 마음껏 항해했다.

가수로서 그는 언제나 파격과 섹시함을 지향했다. 박진영 이전까지만 해도 섹시한 여자 가수는 있었지만 노골적으로 성적인 느낌을 강조한 남자 가수는 없었다. 박진영 이전의 남자 댄스가수들을 돌아보자. 멋있는 오빠, 잘생긴 오빠, 터프한, 귀여운 오빠들은 많았지만 섹시한 오빠는 박진영이 처음 아닌가? 창법과 춤은 물론이고 섹스는 게임이라는 발언이나 이제는 흑역사로 놀림받는 비닐바지 패션 등등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도 박진영은 본능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섹시했다. 가요 역사상 최초로 남성의 몸을 섹스 어필의 수단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도 박진영이라는 가수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댄스가수치고는 히트곡도 참 많다. ‘날 떠나지 마’ ‘너의 뒤에서’ ‘청혼가’ ‘엘리베이터’ ‘그녀는 예뻤다’ ‘허니’ 등이 있고 최근까지도 꾸준히 신곡을 발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90년대 전성기에 히트시킨 노래들보다 최근 몇년간 힘 빼고 내놓은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이 더 좋다. 남자 솔로 댄스가수로서는 굳이 더 욕심부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공한 뒤, 그는 이른 나이에 제작자로 항로를 변경했다. ‘그녀는 예뻤다’로 가요순위 프로그램을 싹쓸이하던 1997년, 가수로서 최고의 해라고 할 수 있는 그해에 제작자로서 첫 작품을 내놓는다. 다음 회에 계속.

에스비에스 피디, 정치쇼 진행자
이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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