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정인경의 과학 읽기
한국 스켑틱 협회 편집부 지음/바다출판사(2018) 사실은 믿음 앞에서 무력하다. 과학적 사실과 증거를 아무리 들이대도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인간의 뇌는 느끼는 대로 믿지 않고, 믿는 대로 느낀다. 믿음은 어떤 가치판단보다 앞선다.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고 있는데도 자신을 합리적이라고 착각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스켑틱(skeptic)은 그리스인들이 ‘생각이 깊다’는 뜻으로 사용한 용어였다. 오늘날에 이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학의 정신, ‘회의주의’로 계승되었다. 스켑틱 협회에서 발간하는 <스켑틱>은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사이비과학이나 유사과학, 유사역사학이 의도적으로 사실을 날조하고 사회악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있다. <스켑틱>은 유사과학과 유사역사학을 동일선에 놓고 비판한다. 이 둘의 논리 전개나 대중의 눈과 귀를 속이는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뒷받침할 증거나 개연성이 없는 주장을 짜맞춰서,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인간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든다. 고생물학에 화석 증거가 있는 것처럼 역사학에는 사료와 유물이 있는데 유사과학이나 유사역사학은 실증적인 증거를 대부분 무시하고 있다. <스켑틱>에서 말하는 ‘회의주의’는 우리가 뭔가를 믿기 전에 반드시 충분한 증거가 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호 <무신론의 시대>에서는 한국 유사역사학의 문제를 파헤쳤다. 역사 왜곡 하면 일본 정치가들의 망발이 떠오르는데, 우리 사회 일부 역사가와 정치가들이 벌이는 역사 왜곡도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는 가짜 역사서로 판명된 대표적인 책들이다. 모두 기원전 수천년 전 단군조선의 역사를 다루는데, ‘상고사’에서 위대한 한민족이 아시아를 지배했다는 ‘국수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20세기에 위작된 것으로 이미 역사학계에서 오래 전에 밝혔다. 그런데 유사역사학은 사그라들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논리를 재생산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서 수십년 동안 대중을 호도하는 데 앞장섰다. “유사역사학은 박정희의 한일협정기에 발흥해서, 유신 기간에 성장하고, 전두환 독재 정권 시절에 만개했다. 거대한 집단적 외상이 우리 사회를 할퀴고 간 때이다. 한동안 잠잠했던 유사역사학이 외환위기(IMF) 사태 이후에 다시 발흥하고 박근혜 정부 시절에 더욱 기승을 부린 것도 사실이다.” 최근에는 수년간 공들여온 역사학계의 사업이 유사역사학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유사역사학자들은 국회의원을 포섭해 정치적 실력행사를 했다. 낙랑군의 위치가 중국이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펼치면서 19대 국회 동북아특위를 구성해 역사학계의 연구 사업을 방해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추진된 ‘동북아역사지도 사업’과 ‘고대 한국 프로젝트 사업’이 2016년에 무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2014년부터 지원이 중단되더니, 2017년 5월에는 하버드대학교 한국고대사 연구실까지 완전히 폐쇄되었다. 유사역사학이나 유사과학의 영향권에 있는 사람은 단지 이상한 것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극우 정치를 선동하고 반지성주의와 사회적 혐오를 조장하고 ‘가짜 뉴스’를 퍼뜨려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맞서려면 의심하고 비판하고 검증하는 ‘과학적 회의주의’가 절실히 요구된다. 정인경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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