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이미옥 옮김/에코리브르(2015) 기억은 우리의 의지나 명령을 듣지 않는다. 괴로웠던 일들은 도무지 잊히지 않고, 행복했던 순간은 어느새 흔적 없이 증발한다. 기억은 왜 끊임없이 변하고 또 사라지는 것일까? 다우어 드라이스마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신경학적으로 탐구하며 기억에서 ‘망각’으로 관심 주제를 넓혔다. 기억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망각이다. 우리는 무엇을 잊어버리며, 왜 잊어버리는 것일까? 기억과 망각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드라이스마는 그 불편함을 쥘 베른의 <달세계 일주>에 나오는 장면으로 이야기한다. 남자 3명은 사냥개 두 마리를 우주선에 태우고 달에 갔다. 유감스럽게도 사냥개 한 마리가 죽었고, 그들은 죽은 개 시체를 우주선 밖으로 버렸다. 며칠 후 한 남자가 창밖의 개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죽은 개는 우주 공간에 떠다니다가 우연히 우주선의 창을 지나간 것뿐인데 불현듯 나타나 사람들을 편치 않게 만들었다. 이때 드라이스마는 우리가 버린 죽은 개를 은유적으로 ‘잠복기억’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사람들을 던져버린다. 결코 보지 않길 바라면서, 우리는 그들과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그들은 늘 다시 나타나고, 결코 사라지려 하지 않는다.”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하는가는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한다. 망각은 우리가 기억 가운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드러낸다. 기억과 망각의 과정은 삶을 흔들어놓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킨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기억을 저장하는 뇌가 기계가 아니라 신체기관이라는 점이다. 뇌는 끊임없이 바뀌는 세포조직으로 이뤄졌고 호르몬의 화학과정에 의해 조절되는 곳이다. 기억의 흔적은 신경학적으로 부패되기도 하고, 때때로 무성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억을 통제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기억은 더욱 어쩔 수 없다. 뇌는 기억의 보유자가 아닌 창조자의 말을 듣는다. 기억의 창조자는 유구한 진화의 역사다. 진화의 과정에서 뇌는 우선적으로 기억해야 할 목록을 가지고 있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억을 남기고 나머지는 지워버린다. 자전거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사고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단 한번 바퀴살에 발이 낀 경험이 기억에 남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진화의 법칙마저 초월하길 원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공포정치에 희생된 사형수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쓸 기회가 주어졌다. 이들의 편지는 전해지지 않았고 수백 통의 편지는 기록보관실에 보존되었다.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썼을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은 ‘나를 잊지 마세요’였다. 그 다음은 ‘용서하시오.’ 죄가 있다면 용서하고, 빚이 있다면 갚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나는 괜찮으니 안녕하시오.’ 살아남은 사람들을 걱정하고 위로하는 마음을 보냈다. 작별하는 사람은 좋은 기억 속에 계속 살아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은 그의 기억을 잘 가꾸고 보살필 것을 약속한다. 드라이스마는 “기억을 가꿀 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사랑과 기억하고자 쏟는 헌신이다”라고 말한다. 마지막 편지도 쓰지 못한 24살의 청년을 망각의 강에 흘려보내지 않기를. 그는 자신이 잊히는 두 번째 죽음을 원치 않을 것이다. 정인경 과학저술가
책 |
생의 마지막 편지, 나를 잊지 마세요 |
[책과 생각] 정인경의 과학 읽기
망각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이미옥 옮김/에코리브르(2015) 기억은 우리의 의지나 명령을 듣지 않는다. 괴로웠던 일들은 도무지 잊히지 않고, 행복했던 순간은 어느새 흔적 없이 증발한다. 기억은 왜 끊임없이 변하고 또 사라지는 것일까? 다우어 드라이스마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신경학적으로 탐구하며 기억에서 ‘망각’으로 관심 주제를 넓혔다. 기억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망각이다. 우리는 무엇을 잊어버리며, 왜 잊어버리는 것일까? 기억과 망각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드라이스마는 그 불편함을 쥘 베른의 <달세계 일주>에 나오는 장면으로 이야기한다. 남자 3명은 사냥개 두 마리를 우주선에 태우고 달에 갔다. 유감스럽게도 사냥개 한 마리가 죽었고, 그들은 죽은 개 시체를 우주선 밖으로 버렸다. 며칠 후 한 남자가 창밖의 개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죽은 개는 우주 공간에 떠다니다가 우연히 우주선의 창을 지나간 것뿐인데 불현듯 나타나 사람들을 편치 않게 만들었다. 이때 드라이스마는 우리가 버린 죽은 개를 은유적으로 ‘잠복기억’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사람들을 던져버린다. 결코 보지 않길 바라면서, 우리는 그들과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그들은 늘 다시 나타나고, 결코 사라지려 하지 않는다.”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하는가는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한다. 망각은 우리가 기억 가운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드러낸다. 기억과 망각의 과정은 삶을 흔들어놓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킨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기억을 저장하는 뇌가 기계가 아니라 신체기관이라는 점이다. 뇌는 끊임없이 바뀌는 세포조직으로 이뤄졌고 호르몬의 화학과정에 의해 조절되는 곳이다. 기억의 흔적은 신경학적으로 부패되기도 하고, 때때로 무성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억을 통제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기억은 더욱 어쩔 수 없다. 뇌는 기억의 보유자가 아닌 창조자의 말을 듣는다. 기억의 창조자는 유구한 진화의 역사다. 진화의 과정에서 뇌는 우선적으로 기억해야 할 목록을 가지고 있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억을 남기고 나머지는 지워버린다. 자전거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사고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단 한번 바퀴살에 발이 낀 경험이 기억에 남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진화의 법칙마저 초월하길 원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공포정치에 희생된 사형수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쓸 기회가 주어졌다. 이들의 편지는 전해지지 않았고 수백 통의 편지는 기록보관실에 보존되었다.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썼을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은 ‘나를 잊지 마세요’였다. 그 다음은 ‘용서하시오.’ 죄가 있다면 용서하고, 빚이 있다면 갚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나는 괜찮으니 안녕하시오.’ 살아남은 사람들을 걱정하고 위로하는 마음을 보냈다. 작별하는 사람은 좋은 기억 속에 계속 살아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은 그의 기억을 잘 가꾸고 보살필 것을 약속한다. 드라이스마는 “기억을 가꿀 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사랑과 기억하고자 쏟는 헌신이다”라고 말한다. 마지막 편지도 쓰지 못한 24살의 청년을 망각의 강에 흘려보내지 않기를. 그는 자신이 잊히는 두 번째 죽음을 원치 않을 것이다. 정인경 과학저술가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이미옥 옮김/에코리브르(2015) 기억은 우리의 의지나 명령을 듣지 않는다. 괴로웠던 일들은 도무지 잊히지 않고, 행복했던 순간은 어느새 흔적 없이 증발한다. 기억은 왜 끊임없이 변하고 또 사라지는 것일까? 다우어 드라이스마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신경학적으로 탐구하며 기억에서 ‘망각’으로 관심 주제를 넓혔다. 기억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망각이다. 우리는 무엇을 잊어버리며, 왜 잊어버리는 것일까? 기억과 망각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드라이스마는 그 불편함을 쥘 베른의 <달세계 일주>에 나오는 장면으로 이야기한다. 남자 3명은 사냥개 두 마리를 우주선에 태우고 달에 갔다. 유감스럽게도 사냥개 한 마리가 죽었고, 그들은 죽은 개 시체를 우주선 밖으로 버렸다. 며칠 후 한 남자가 창밖의 개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죽은 개는 우주 공간에 떠다니다가 우연히 우주선의 창을 지나간 것뿐인데 불현듯 나타나 사람들을 편치 않게 만들었다. 이때 드라이스마는 우리가 버린 죽은 개를 은유적으로 ‘잠복기억’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사람들을 던져버린다. 결코 보지 않길 바라면서, 우리는 그들과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그들은 늘 다시 나타나고, 결코 사라지려 하지 않는다.”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하는가는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한다. 망각은 우리가 기억 가운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드러낸다. 기억과 망각의 과정은 삶을 흔들어놓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킨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기억을 저장하는 뇌가 기계가 아니라 신체기관이라는 점이다. 뇌는 끊임없이 바뀌는 세포조직으로 이뤄졌고 호르몬의 화학과정에 의해 조절되는 곳이다. 기억의 흔적은 신경학적으로 부패되기도 하고, 때때로 무성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억을 통제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기억은 더욱 어쩔 수 없다. 뇌는 기억의 보유자가 아닌 창조자의 말을 듣는다. 기억의 창조자는 유구한 진화의 역사다. 진화의 과정에서 뇌는 우선적으로 기억해야 할 목록을 가지고 있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억을 남기고 나머지는 지워버린다. 자전거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사고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단 한번 바퀴살에 발이 낀 경험이 기억에 남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진화의 법칙마저 초월하길 원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공포정치에 희생된 사형수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쓸 기회가 주어졌다. 이들의 편지는 전해지지 않았고 수백 통의 편지는 기록보관실에 보존되었다.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썼을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은 ‘나를 잊지 마세요’였다. 그 다음은 ‘용서하시오.’ 죄가 있다면 용서하고, 빚이 있다면 갚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나는 괜찮으니 안녕하시오.’ 살아남은 사람들을 걱정하고 위로하는 마음을 보냈다. 작별하는 사람은 좋은 기억 속에 계속 살아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은 그의 기억을 잘 가꾸고 보살필 것을 약속한다. 드라이스마는 “기억을 가꿀 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사랑과 기억하고자 쏟는 헌신이다”라고 말한다. 마지막 편지도 쓰지 못한 24살의 청년을 망각의 강에 흘려보내지 않기를. 그는 자신이 잊히는 두 번째 죽음을 원치 않을 것이다. 정인경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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