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정인경의 과학 읽기
정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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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지음/웅진 지식하우스(2019) 우리는 단 하나의 세포에서 탄생했다. 우리가 단세포 시기를 거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유전자를 전달하려면 단세포로 되돌아갔다가 유성 생식을 하고, 그 단세포가 불어나서 다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유전자 재조합이 일어나는 정자와 난자의 만남, 그 이후에 배아 발생과정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인종, 민족, 성별은 물론 외모, 성격, 취향 등이 결정된다. 하지만 이러한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다. <탄생의 과학>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발생학을 다룬 책이다. 저자 최영은은 발생학자라기보다 유전학자에 가깝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만큼 발생학은 유전학과 세포생물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20세기 초반, 초파리로 유전의 전달 메커니즘을 발견한 토머스 모건은 애초 발생학자였다. 유전자는 유전 현상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생물의 발생에 관여하고 있었다. 유전자가 하나의 세포에서 어떻게 생물 전체를 자라나게 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유기체 생물학의 수수께끼였는데 최근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의 발전으로 배아 발생의 깊은 수준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유전자가 배아에서 생겨나는 세포들을 통제해서 팔다리와 장기, 생식기 같은 해부학적 특징을 결정했던 것이다. 최영은은 발생의 과정을 ‘기억에 없는 기적’이라고 말한다. 우리 몸은 좌우대칭으로 보이지만 근원적으로 비대칭적이다. 위와 아래(머리와 다리)가 다르고 몸속의 장기들은 좌우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간은 오른쪽에 있고, 비장은 왼쪽에 있다. 또한 머리는 하나, 손가락은 다섯이다. 이러한 인간이 발달하는 과정은 유전자, 단백질, 세포들이 복잡한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정해지지 않은 환경에 반응하며 기적에 가까운 일을 해낸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교과서에서 배운 과학 지식이 참으로 빈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례로 생물학적 성이 X, Y염색체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XY는 남성, XX는 여성으로 알고 있지만 XXX여성, XO여성, XXY남성, XXXY남성이 있고, XY가 여성인 경우도 있다. 수천년 동안 우리는 남녀의 해부학적 차이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20세기에 성염색체가 발견되었지만 이것으로 설명되지 않은 예외적 사례가 속출했다. 1989년에 Y염색체에 있는 SRY유전자가 발견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우리 몸의 세포는 여성과 남성의 특징을 만드는 유전자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유전자들 사이에는 계층 구조가 있었다. 바로 SRY유전자가 맨꼭대기에서 다른 유전자들을 켜고 끄면서 발현시키는 역할을 했다. 발달 단계는 도미노 블록이나 계단 폭포처럼 수많은 유전자에 의해 조율되었다. 이러한 성을 결정하는 기작은 평생에 걸쳐 작동하며 성 정체성을 빚어낸다. 성은 여성과 남성으로 칼로 자른 듯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천 가지 색조의 스펙트럼을 갖는다. 과학의 목표는 “점진적으로 편견을 없애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실험실 안과 밖에서 과학과 사회가 맞닿은 부분에 고민의 흔적을 남긴다. 발생학과 관련된 임신과 수정, 후성유전학, 인간 배아 복제, 세포 치료제, 줄기세포, 인공장기 등을 다루며, 사회적 이슈를 던진다. 발생의 첫 단계부터 우리 사회는 고정된 성역할의 관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돌진하는 정자, 기다리는 난자”는 만들어진 이미지일 뿐이다. 언제쯤 청소년 성교육 영상물의 내용이 바뀔까?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일상의 풍경이 조금씩이라도 변화하길 기대한다.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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