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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4.28 20:54 수정 : 2016.12.21 15:49

편집자가 고른 스테디셀러

제7의 인간: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
존 버거 글, 장 모르 사진, 차미례 옮김/눈빛(1996/2004)

글 만지는 일이 직업이고 글의 힘을 격하게 아끼지만, 때로 사진 한 장에서 글만으로는 필적할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잘 찍은 스틸사진은 대상의 시간성과 운동성을 응축해서, 보는 이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이는 사진이 글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이미지와 글의 메시지가 송수신되는 주파수 대역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글은 사진 이미지에 비해 느리게 수신되지만, 대신 그 파장은 계속해서 귀에 울릴 만큼 길다. 즉각적이고 구체적으로 시각에 상(像)을 새기는 이미지와 깊게 울리며 끈질기게 귓가를 맴도는 문장을 잘 꿰어 하나의 목소리로 만들면 그 호소력은 배가될 것이 분명하다.

포토에세이류의 책들도 그렇고 요즘은 사진과 글을 함께 엮은 책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이 만나 가장 강력한 상승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장르는 아마도 르포문학일 것이다. 평론가이자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인 존 버거의 글과 장 모르의 사진을 한데 묶은 <제7의 인간>이 바로 그런 책이다. 르포문학 자체가 아직 낯선 장르일 적에 읽었지만(1990년대 말. 지금도 상대적으로 생경하긴 마찬가지다), 꿈/악몽과 현실을 넘나드는 시적 문장 및 분석적 산문, 사진들로 채워진 이 책은 지금까지도 나의 애장서로 남아 있다.

이 책에서 존 버거와 장 모르가 합심해 전하는 주제는 부자유(不自由)다. 그 부자유는 1970년대 유럽 이민노동자의 부자유인데, 두 사람은 이 문제를 구체적인 이민노동자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바라본다. 늪과 같은 생활을 벗어나 나도 “성공의 비밀”을 배워 영웅이 되겠다, 꿈을 안고 타국으로 향하는 여정, 죄다 낯설고 적대적인 것뿐인 곳에서 구직 테스트에 “합격해 새로 태어난 후” “전신주처럼 지나가는 날짜들”을 보내는 나날들, 마침내 터널을 지나 “신화적”인 귀향에 성공하지만 더 이상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된 고향의 풍경까지.

장 모르의 사진에 먹먹해지다가, 존 버거의 시적 묘사에 가슴이 젖어들고, 세계를 움직이는 계산들을 해부하는 존 버거의 냉철한 산문에 마주쳐서는 머릿속이 일순 차가워진다. “그”를 둘러싼 세계의 변화(거기에는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소리와 냄새와 촉감까지 포함된다), 그리고 설렘, 동경, 좌절, 두려움, 불안, 고통, 모욕감, 욕망, 그리움, 희망, 체념. 이 모든 감정들이 곧 그의 삶이고, 그가 속한 세계다. 그리고 “역사는 그의 상황의 일부분이며, 이미 그의 경험에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그의 비극의 한 부분이다.”

천정은 도서출판 길 편집차장
지금 한국에서 일하는 이민노동자의 경험과 40년 전 유럽의 이민노동자의 경험은 얼마나 다를까. 우리 곁에 100만명이나 있다는데, 그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800만명 비정규직과 100만명 청년 실업자들의 경험은 또 어떨까. 무표정과 교묘한 계산들의 틈바구니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절박함은 정규직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한국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젊은이들이 미군에 줄지어 자원입대를 하며 또 다른 이민노동자로 태어나고 있다. 우리의 과거는 현재에 아무 쓸모가 없고, 미래는 말 그대로 오려면 아직 먼 것만 같다.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고립된 우리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게 되어가고 있다. 모두가 세계와 타인에 대해 잘난 체 설명만 하려 들 때, 존 버거와 장 모르는 역사의 뒤로 잔해가 되어 쌓여가는 것들에 눈길을 준다.

천정은 도서출판 길 편집차장

※이번주부터 천정은 도서출판 길 편집차장이 집필합니다. 4주 간격으로 세 권의 책을 소개하되, 그중 한 권은 자사 책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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