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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9.06 19:59 수정 : 2018.09.06 20:41

[책과 생각] 편집자가 고른 스테디셀러

안나 까레니나
레프 똘스또이 지음, 이명현 옮김/열린책들(2018)

바람기 때문에 곤경에 처한 스티바(안나의 오빠)가 오랜만에 친구 레빈을 만난다. 식사 중 스티바는 ‘죄 없는 자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는 모두가 잘 아는 성경 이야기를 언급한다. 레빈은 역정을 낸다. “아아, 그만하게! 사람들이 그 말을 악용할 줄 알았더라면, 그리스도는 그 얘기를 입 밖에 내지도 않았을 걸세.” 앞으로 이 책에서 여러 등장인물이 이 구절을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는’ 돌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일화가 소비되는 방식 자체를 문제 삼으며 말하는 사람은 레빈이 유일하다.

안나의 이야기는 그 성경 일화 못지않게 유명해졌다. 지금 <안나 카레니나>를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라고 하는 건 딱히 열렬한 찬사가 되기도 힘들 것이다. 2007년 영미 작가 125명의 투표에서도 <안나>는 최고의 소설 1위를 차지했다. ”톨스토이가 이런 책을 또 쓸 수 있었다면,” 언젠가 지드는 쓴 적이 있다. “말년의 예술 부정론은 없었을 것이다.”

일본 최초의 원전 번역이 나온 건 1921년이다(중국은 1981년). 1969년에 나온 동완의 정음사판은, 만일 그전에 나온 북한판이 없다면, 최초의 한국어판이다. 뒤이은 1972년 박형규(신구문화사), 1983년 이철(주우) 역본은 출판사를 바꾸어 지금도 쇄를 거듭하는 현행판이다. 그 뒤에도 꾸준히 새 번역들이 나타났고, 필자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도 올해 신역본 하나를 추가했다. 편집을 거들면서 가장 뜻밖이었던 것은 이 책의 강렬한 종교성이었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안나 카레니나 역으로 나온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안나 카레니나>(2012)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 영화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로마서 12:19) 이 제사(題詞)의 의미는 뭔가?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니 인간들이 굳이 나서서 불행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말라는 뜻일까? 토마스 만은 우리가 이런 착한 해석을 따를 경우 모순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안나가 사교계에서 겪는 온갖 모욕과 추방을 신이 주는 벌과 구별할 수 있을까? 다르다면 뭐가 달라야 할까? 신의 역사(役事)는 사실 어리석고 잔인한 인간들을 동원하는 식으로 이뤄지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 제사의 본뜻은 ‘어떤 벌을 받는지 보라’가 될 것이고, 우리는 이야기의 압력이 미칠 듯이 상승한 것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신의 개입이 선언된 이야기에서 필연적이지 않거나 무의미한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 모든 미세한 행위들은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고 결말로 날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유명한 첫 구절인데, 핵심은 그 닮음의 실체가 뭔지 작가가 안다는 것이다. 행복한 가정들은 닮았다. 신의 은총이라는 단일한 공통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없으면 제각각의 인간, 제각각의 불행만 남을 뿐이다. 천 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첫 줄에 할 말(행복이란 무엇인가? - 신의 은총)을 다 써놓고 시작했다! (문호는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그리 명확하지 않다. 우리는 안나/브론스키, 레빈/키티라는 대조적인 커플을 보면서 불행한 전자의 길을 버리고 행복한 후자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조차 그렇게 확신했을지는 의문이다. 은총이란 주어지는 것이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레빈의 행복의 길은 편안하지 않다. 회의와 고투로 가득 차 있다. 결국 그는 행복을 획득하지만, 그 행복이 애초에 남의 것이었을 리는 없다. 누구든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만 가져올 수 있을 뿐이다. 독자는 안나 앞에 그런 행복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고, 적어도 파멸은 면하게 해주었을 수습책들을 그녀가 계속 거부하던 것도 떠올리게 된다. 자기에게 허락된 몫이 없다면 -아마 어느 순간 그녀는- 어차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그런 결말도 있을 거라고 작가 역시 생각했던 것 아닐까.

김영준 열린책들 문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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