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도서출판b(2006) 한국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만큼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도 많지 않을 것이다. 출간된 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진은 계속되고 있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무덤덤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시대적 변화가 이 책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뒷받침하는 증거인지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주장은 비교적 간단명료하다.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근대문학 이후에 포스트문학이 있다는 말도 문학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말도 아니다. 문학이 근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 이것은 단적인 사실이기에 왈가왈부할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저자는 ‘문학의 종언’ 자체보다는 ‘문학이 큰 의미를 지녔던 시대’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매우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문학이 영향력을 잃어가는 이유와 세계자본주의의 전개 과정, 소설과 영화의 관계, 번역의 문제, 사소설의 위상, 리즈먼의 사회분류, <금색야차> 분석, 기타무라 도코쿠의 ‘연애’ 개념 등. 하지만 한국문학계는 이것들은 거의 주목을 하지 않았고 오로지 ‘종언’이라는 말 자체만 집중했다. 한국문학계가 보인 이런 반응의 협소함은 일차적으로 허탈감과 관련이 있었다. 일본문학의 경우는 어떤지 모르지만 한국문학은 이제 막 세계로 진출하려는 참인데 그것이 끝났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오로지 금메달만 보고 달려온 선수에게 갑자기 해당 종목의 폐지를 선고한 상황과 같았다. 그런데 정말 뼈아팠던 가라타니의 지적 중 하나는 문학이 끝난 증거로서 ‘창작학과의 증가와 작가들의 교수화’를 이야기한 점이었다. 저자의 의도와 달리 그것은 여하튼 오늘날 한국문학의 생산구조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문학을 손쉽게 비판하는 방법은 일본소설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소위 사소설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 일종의 교양소설론이라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은 어떤 의미에서 사소설론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의외일지 모르지만 가라타니는 사소설에 대해 긍정적이다. 이는 <근대문학의 종언>에서도 다르지 않다. 일본 근대문학 전체에서 사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되는 것은 그것이 가진 문제성 때문이라 하겠는데, 이는 정확히 독일문학에서 교양소설이 갖는 위치와 유사하다. 문학적 후진국이었던 일본과 독일에서 ‘3인칭 객관묘사’(화자를 제거하는 기법)로 이루어진 근대문학은 익숙하지 않은 ‘상징형식’으로,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상황에서 탄생한 사소설을 근대소설에 미달한 기형적인 형태로 비판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처럼 후기인상파에 대응하는 선구성을 사소설에서 발견한 사람도 있었다. 다시 말해 사소설을 근대문학의 자명성을 통속성으로 간주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허구성을 배제하거나 역으로 극대화시킨 반(反)소설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나쓰메 소세키와 사소설은 통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간과해서는 곤란하지만. 그런데 독일에 교양소설이 있었고 일본에 사소설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소설이 있었을까. 물론 문학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여전히 건재하다고 믿는다면, 불필요한 질문일 수 있다. 조영일 도서출판b 주간
책 |
문학은 정말 끝났는가 |
[책과 생각] 편집자가 고른 스테디셀러
근대문학의 종언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도서출판b(2006) 한국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만큼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도 많지 않을 것이다. 출간된 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진은 계속되고 있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무덤덤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시대적 변화가 이 책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뒷받침하는 증거인지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주장은 비교적 간단명료하다.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근대문학 이후에 포스트문학이 있다는 말도 문학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말도 아니다. 문학이 근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 이것은 단적인 사실이기에 왈가왈부할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저자는 ‘문학의 종언’ 자체보다는 ‘문학이 큰 의미를 지녔던 시대’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매우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문학이 영향력을 잃어가는 이유와 세계자본주의의 전개 과정, 소설과 영화의 관계, 번역의 문제, 사소설의 위상, 리즈먼의 사회분류, <금색야차> 분석, 기타무라 도코쿠의 ‘연애’ 개념 등. 하지만 한국문학계는 이것들은 거의 주목을 하지 않았고 오로지 ‘종언’이라는 말 자체만 집중했다. 한국문학계가 보인 이런 반응의 협소함은 일차적으로 허탈감과 관련이 있었다. 일본문학의 경우는 어떤지 모르지만 한국문학은 이제 막 세계로 진출하려는 참인데 그것이 끝났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오로지 금메달만 보고 달려온 선수에게 갑자기 해당 종목의 폐지를 선고한 상황과 같았다. 그런데 정말 뼈아팠던 가라타니의 지적 중 하나는 문학이 끝난 증거로서 ‘창작학과의 증가와 작가들의 교수화’를 이야기한 점이었다. 저자의 의도와 달리 그것은 여하튼 오늘날 한국문학의 생산구조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문학을 손쉽게 비판하는 방법은 일본소설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소위 사소설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 일종의 교양소설론이라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은 어떤 의미에서 사소설론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의외일지 모르지만 가라타니는 사소설에 대해 긍정적이다. 이는 <근대문학의 종언>에서도 다르지 않다. 일본 근대문학 전체에서 사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되는 것은 그것이 가진 문제성 때문이라 하겠는데, 이는 정확히 독일문학에서 교양소설이 갖는 위치와 유사하다. 문학적 후진국이었던 일본과 독일에서 ‘3인칭 객관묘사’(화자를 제거하는 기법)로 이루어진 근대문학은 익숙하지 않은 ‘상징형식’으로,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상황에서 탄생한 사소설을 근대소설에 미달한 기형적인 형태로 비판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처럼 후기인상파에 대응하는 선구성을 사소설에서 발견한 사람도 있었다. 다시 말해 사소설을 근대문학의 자명성을 통속성으로 간주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허구성을 배제하거나 역으로 극대화시킨 반(反)소설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나쓰메 소세키와 사소설은 통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간과해서는 곤란하지만. 그런데 독일에 교양소설이 있었고 일본에 사소설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소설이 있었을까. 물론 문학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여전히 건재하다고 믿는다면, 불필요한 질문일 수 있다. 조영일 도서출판b 주간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도서출판b(2006) 한국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만큼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도 많지 않을 것이다. 출간된 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진은 계속되고 있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무덤덤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시대적 변화가 이 책의 모순을 보여주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뒷받침하는 증거인지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주장은 비교적 간단명료하다.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근대문학 이후에 포스트문학이 있다는 말도 문학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말도 아니다. 문학이 근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 이것은 단적인 사실이기에 왈가왈부할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저자는 ‘문학의 종언’ 자체보다는 ‘문학이 큰 의미를 지녔던 시대’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매우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문학이 영향력을 잃어가는 이유와 세계자본주의의 전개 과정, 소설과 영화의 관계, 번역의 문제, 사소설의 위상, 리즈먼의 사회분류, <금색야차> 분석, 기타무라 도코쿠의 ‘연애’ 개념 등. 하지만 한국문학계는 이것들은 거의 주목을 하지 않았고 오로지 ‘종언’이라는 말 자체만 집중했다. 한국문학계가 보인 이런 반응의 협소함은 일차적으로 허탈감과 관련이 있었다. 일본문학의 경우는 어떤지 모르지만 한국문학은 이제 막 세계로 진출하려는 참인데 그것이 끝났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오로지 금메달만 보고 달려온 선수에게 갑자기 해당 종목의 폐지를 선고한 상황과 같았다. 그런데 정말 뼈아팠던 가라타니의 지적 중 하나는 문학이 끝난 증거로서 ‘창작학과의 증가와 작가들의 교수화’를 이야기한 점이었다. 저자의 의도와 달리 그것은 여하튼 오늘날 한국문학의 생산구조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문학을 손쉽게 비판하는 방법은 일본소설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소위 사소설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 일종의 교양소설론이라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은 어떤 의미에서 사소설론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의외일지 모르지만 가라타니는 사소설에 대해 긍정적이다. 이는 <근대문학의 종언>에서도 다르지 않다. 일본 근대문학 전체에서 사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되는 것은 그것이 가진 문제성 때문이라 하겠는데, 이는 정확히 독일문학에서 교양소설이 갖는 위치와 유사하다. 문학적 후진국이었던 일본과 독일에서 ‘3인칭 객관묘사’(화자를 제거하는 기법)로 이루어진 근대문학은 익숙하지 않은 ‘상징형식’으로,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상황에서 탄생한 사소설을 근대소설에 미달한 기형적인 형태로 비판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처럼 후기인상파에 대응하는 선구성을 사소설에서 발견한 사람도 있었다. 다시 말해 사소설을 근대문학의 자명성을 통속성으로 간주하고 그 안에 존재하는 허구성을 배제하거나 역으로 극대화시킨 반(反)소설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나쓰메 소세키와 사소설은 통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간과해서는 곤란하지만. 그런데 독일에 교양소설이 있었고 일본에 사소설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소설이 있었을까. 물론 문학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여전히 건재하다고 믿는다면, 불필요한 질문일 수 있다. 조영일 도서출판b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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