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편집자가 고른 스테디셀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반비(2016) 엄마가 돌아가셨다. 예고 없는 이별이었다. 마음이 북극 빙하처럼 무너져 내렸다. 앉아 있어도, 서 있어도, 누워 있어도 수시로 마음은 무너졌고 녹아내린 빙하가 몸으로 새어 나오듯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엄마가 불행하게 살던 모습만, 내가 잘해주지 못한 기억만 떠올랐다. 끝이 보이지 않는 슬픔과 허망함을 안고 복귀한 지 열흘 후, 나는 곧 출간할 책의 마지막 교정을 보게 되었다. 작가 위화의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글이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싶었는데, 그대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마음에 쌓인 빙하가 조금씩 증발하도록 방아쇠를 당겨준 이야기가, 거기 있었다. 장이머우가 영화로 만들어 화제를 모은 그의 대표작 <인생>. 위화는 이 책을 3인칭으로 쓰다가 막혀, 1인칭으로 바꿨다. 자산을 탕진하고 자식을 앞세운 주인공 푸구이의 삶은 관찰자 시점에서 보면 고난뿐이지만, 푸구이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자 고통 속에도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이 마냥 비극만은 아니라는 소박한 이치. 관찰자인 나에게 엄마의 삶은 비극이지만, 엄마 스스로는 아름답기도 했으리라. 이 이야기를 읽지 않았다면, 내 기억 속 엄마의 삶은 그저 잿빛이었을 것이다. 이럴 때는 내가 이야기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나를 찾아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은 보다 넓고, 깊게 이야기의 힘을 풀어낸다. 솔닛은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페미니스트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서정적인 산문의 대가(<뉴요커>)”다. 어느 날 집에 살구 더미가 도착한다. 2년 전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의 집 마당에 있는 나무에서 딴 것들이다. 그것들을 바닥에 펼치자, 해야 했으나 하지 못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솔닛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없는 것, 예를 들어 금발이나 둥근 눈썹을 지닌 딸을 시기한다. 어머니를, 어쩌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시작한 솔닛의 이야기는 인간 사유에 한계란 없음을 증명하듯 확장된다. 의학도에서 혁명가로 변신한 체 게바라 이야기는 고통이 자아의 경계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로 엮인다.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고 다짐한 20대 후반의 솔닛은 꼭 같은 이유로 아이슬란드행 비행기에 오르는 40대의 솔닛과 포개진다. <눈의 여왕>이 씨실이라면, 붓다의 삶은 날실이다. 수십 년 동안 속을 뒤집어 놓은 어제의 어머니가 씨실이 되고, 살구를 딴 여름 이후 매일 변해가는 오늘의 어머니가 날실이 된다. 작가가 그렇게 썼기 때문이 아니라 독자가 그렇게 읽을 것이기 때문에 세상 모든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내게는 엄마와 딸 이야기였다. 자신과 달라서 화를 내던 엄마, 엄마와 닮아서 끔찍해했던 내가 거기 있었다. 이야기가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이야기는 우리를 먹고살게 하지 않는다. 읽고 문밖을 나선다고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소나기가 아니라 가랑비다. 서서히 스며들어 태도를 바꾸고 조금 더 괜찮은 삶을 살도록 이끈다.
※ 이번 주부터 이은정 푸른숲 편집장이 집필합니다. 4주 간격으로 세 권의 책을 소개하며, 그중 한 권은 자사 책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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