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2.01 06:00
수정 : 2019.02.01 09:54
[책과 생각] 편집자가 고른 스테디셀러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창비(2016)
집에 아빠가 오는 일은 몹시 귀찮다. 엄마는 올 때마다 해먹일 음식거리를 바리바리 싸왔으나 아빠는 와서 해주는 것, 사주는 것만 드신다. 엄마는 지저분한 베란다를 보고 소매를 걷어붙이셨지만 아빠는 소파가 지정석이다. 당신이 마실 물을 따르러 올 때만 주방에 발을 들인다. 애랑 요령 있게 놀아주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저 묵묵히 아빠는 텔레비전을 아이는 아이패드를 본다. 남편한테는 아빠 흉을 본다. “가부장의 화신이야.”
그런 아빠가 집에 오면 몹시 귀찮지만, 어느새 잘해드린다. 없는 솜씨로 요리 비슷한 걸 해드리거나 집 근처 가장 맛있는 곳엘 모셔간다. 아침으로 드실 된장국을 끓여놓고 나물 같은 반찬을 사다 낸다. 그동안 잠깐 벗어둔 돌봄노동용 갑옷을 부지불식간에 장착하는 기분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인지부조화도 이런 인지부조화가 없다. 한동안 나는 ‘페미니즘이 나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온갖 부조리가 눈에 들어왔지만, 내 삶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무기력 때문이었다.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온 기분을 자주 느꼈다.
가족이 아니었다면, 아빠 같은 세상물정 모르는 할아버지는 내 인생에서 영원히 아웃이었을 거다. 매일 얼굴 맞대며 사는 남편과는 좁힐 수 없는 인식차이로 자주, 대차게 싸운다. 화가 날 땐 이혼 생각이 불끈 솟지만, 어느새 유야무야된다. 가족 관계에 페미니즘이 끼어들 틈을 내기가 쉽지 않다. 제삼자의 무개념 행동은 침을 튀기며 욕하지만, 내 가족에게는 그토록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기 어렵다. 이런 내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불러도 되는 걸까?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쓴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절친에게 “있잖아. 너 꼭 페미니스트 같아”라는 말을 들었다. 당연히 칭찬으로 한 소리가 아니다. 그 단어에 부정적인 함의가 담겼음을 강조하는 힐난이다. 아디치에는 사전을 찾아본다. “페미니스트: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 페미니즘은 기혼이든 비혼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모든 성별이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어쩌면 한가한 소리 같아 보이는 이 명제가 페미니즘의 에센스라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스트고 뭐고, 아빠한테 그 정도는 다 해드리는 거 아니냐, 왜 그리 사소한 걸로 따지고 드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해드릴 수 있다. 그러나 아빠의 ‘당연히 대접받아야 한다’와 엄마의 ‘내가 뭐라도 해줄 것 없나’는 대물림된다. 항상 대접받아야 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사소한 일이 더 아픈 법이다.” 사소하기 때문에 방치한 차별과 불평등, 폭력이 켜켜이 쌓여 모순덩어리가 빚어진다.
나는 미래엔 아빠 같은 사람은 딸이 인연을 끊는대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결단을 내리기 전에, 이번 명절엔 이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건넬 참이다. 선물용으로 또 한 권을 쟁여둔다. 아홉살짜리 아들은 대물림을 끊고 멀쩡하게 살았으면 해서다. 누가 됐든, 아이의 편견과 무지 때문에 파트너가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이에게 부메랑이 되어 불행으로 돌아올 것이 뻔하기에. 아이의 행복을 바라는 나는 아이가 중학생이 되는 날, 이 책을 선물할 것이다.
이은정 푸른숲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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