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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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양경언의 시동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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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2019년 9월호 삶은 내가 ‘되고 싶은 나’와 아직 거기에 ‘다다르지 않은 나’ 사이에서 발버둥을 치는 일의 연속이라지만, 그 간극이 특히나 요원하다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지금 이곳의 현실을 이루는 여러 조건에 당연히 매어 있는 자기 자신의 몸이 구체적으로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때 당면한 상황을 입체적으로 조망 가능한 시야를 얻기 위해서 행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가 상상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어떨까, 이곳이 아니라면 다를까, 다르다면 어떻게 다를까를 헤아리는 상상은 저 자신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도록 스스로가 허락한 방식이자 인간이라면 누구나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상상도 능력이라고 했거니와, 실감의 차원이 떨어질지라도 그것을 두고 허무한 가짜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이때 현실은 벗어나고 싶은 지금 이곳에서 안간힘을 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안간힘의 고유성이 삶을 지속시키기도 한다는 얘기다. 삶에서 ‘진짜’란 무엇인가. 대책 없이 커다란, 그러나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물음도 여기에서 솟아난다. “눈 감고 왼손을 펼친다//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오른손으로/ 왼손 손가락마다/ 잎 무성한 나무를 심는다// 손바닥에/ 붉은 벽돌을 쌓아 이층집을 짓고/ 자전거 탈 만한 마당을 만든다// 작은 연못을 파고/ 몇 마리 물고기도 풀어둔다// 일가족이 현관문을 열고 나와/ 마당에서 햇살을 맞는 가을// 모두 헛것이지만// 상상을 끝내기 전에/ 해 질 무렵까지/ 마당에서 놀던 가족이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왼손을 가만히 오므린다/ 그저 밤이 온 줄 알도록/ 아침을 기다리며 꿈을 꾸도록”(‘모두 헛것이지만’ 전문) 시에는 옹기종기 모인 일가족의 단란한 한때가 그려지고 그것을 그리는 ‘내’가 등장하기도 한다. 풍성한 나무와 붉은 벽돌로 이뤄진 이층집과 연못과 물고기가 있는 마당에 햇살이 비치는 순간을 그리는 걸 보면, 이 모든 것은 지금 ‘내’가 있는 곳에 없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헛것”일지언정 없는 것으로 여기진 않는다. 마당에 있던 이들이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또한 집 안으로 들어간 이들이 밤을 잘 나기까지, 그 세계에 부여된 시간성을 돌본다. 그곳에 삶의 구체성이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놓아두고 가만히 기다릴 줄 아는 이는 “모두 헛것이지만” 그것을 진짜의 세계로 기어이 끌어올린다. 살면서 무엇을 꿈꾸는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인을 따라 눈을 감고 왼손을 펼쳤다가, 다시 눈을 뜨고 그 펼쳤던 왼손을 쳐다본다. 나의 손가락 위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나, 나의 손가락이 지닌 구체적인 물성은 달아나지 않고 제자리에 있다. 내 몸과 내 몸이 서 있는 지반이 갖춘 의미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 중 하나는 어쩌면 헛것으로 진짜를 말할 줄 아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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