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경제대 교수 올해는 작곡가 윤이상의 탄생 100주년이다. 독일에서는 9월에 기념 콘서트와 심포지엄이 열렸다. 일본에서는 11월18일 조키 세이지 도쿄대 교수 주관 아래 기념 심포지엄이 열려 나도 초청 연사로 참석했다. 윤이상이 태어난 건 1917년. 1995년에 객지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78년 생애 가운데 앞 3분의 1은 식민지시대, 나머지 3분의 2는 ‘분단시대’였다. 윤이상은 사회생활이나 예술에서 근원적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삶을 일관되게 살았다. 그것은 그의 예술의 본질이었다. ‘분단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일촉즉발의 제2차 조선(한국)전쟁 위기마저 임박한 상황이다. 아직은 우리가 윤이상을 잊어도 좋을 때가 아니다. 1951년생인 나는 일본에서 접한 동베를린 사건(1967년) 보도를 통해 윤이상이라는 존재를 알았다. 그 3, 4년 뒤 모국 한국에 유학중이던 나의 두 형(서승, 서준식)이 ‘학원침투 간첩단’ 혐의로 체포당했고, 윤이상의 운명은 돌연 나에게 현실감을 띠게 됐다. 1981년 5월13일 도쿄에서 <상처 입은 용>(루이제 린저와의 대담) 일본어판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광주 5·18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그때 나의 형들은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 실로 암흑시대였다. 그때 처음 가까이서 선생의 얼굴을 뵈었으나 긴장한 탓에 아무 말도 걸지 못했다. 그렇게 만난 <상처 입은 용>은 내 인생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책이 됐다. 이 책은 어머니가 윤 선생을 뱄을 때 꾼 태몽 이야기로 시작한다. 지리산 상공을 용이 날아가는 꿈. 하지만 그 용은 상처를 입어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고 발버둥 쳐도 그럴 수 없었다. 이 얼마나 웅혼하고 신화적인 이미지인가. 게다가 그 용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얼마나 예언적인가. 그 이미지는 선생이 동베를린 사건으로 투옥당했다가 석방된 지 10년 가까이 지난 뒤 첼로 협주곡(1975/76)으로 열매를 맺었다. “저 종말부의 옥타브 도약을 떠올려 보세요. 그 도약은 자유, 순수, 절대를 향한 희구와 바람을 의미합니다. 오케스트라에서는 오보에가 G#(지 샤프)음에서 A음까지 활주음(글리산도)으로 올라가고, 이 A음을 트럼펫이 이어받습니다. 첼로는 거기까지 도달하려 하지만 좀체 갈 수 없습니다. 첼로는 글리산도로 G#음에서 4분의 1음만큼의 높이까지 올라가지만 그 이상은 올라갈 수 없습니다.” 어느 예술가가 “꿈이 인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꿈을 모방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실로 윤이상의 생애는 이 꿈처럼 절대적인 해방의 환희에 겨우 4분의 1음을 남기고 도달하지 못하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또 그것은 그 개인의 좌절의 역사라기보다 우리 민족의 경험을 상징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4분의 1음이라는 근소한 간극이 만들어내는 음의 울림이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美)을 낳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1983년 늦가을, 처음으로 서베를린의 선생 댁을 찾아갔다. 선생의 부인 이수자씨는 광주사건 때 “선생님이 텔레비전 보도를 보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셨던지”라며 말했다. “울면서 작곡하셨다.” 1984년, 일본 군마현에서 열린 구사쓰(草津)국제아카데미 초대 작곡가는 윤 선생이었다. 그해 8월24일에 ‘윤이상의 저녁’ 콘서트가 열렸고 나도 교토에서 달려갔다. 그날 연주된 다섯 곡 중 첫 곡은 ‘이마주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1968)으로, 북을 방문했을 때 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고분벽화를 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북에 갔다는 선생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꼭 이 음악을 들어보시기 바란다. 운이 좋으면, 자신이 오랜 왕묘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에 사로잡힐 것이다. 다섯 곡 중 마지막 곡은 “울면서 작곡했다”는 ‘밤이여, 나뉘어라(Teile dich Nacht)―소프라노와 실내악을 위한’(1980)이었다. 넬리 작스의 시를 활용한 것이다. 작스는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한 유대계 여성 시인이다. 피해망상과 정신착란으로 고생하다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 시구의 마지막. “나뉘어라 밤이여/ 너의 두 날개는 부들부들 떨고 있구나// 내가 가서/ 피투성이 저녁을/ 되찾아 오마” 이 구절이 지극히 고음의 소프라노로 비명처럼, 또한 속삭임이나 한숨처럼 울려퍼지면서 허공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참으로 비통하고, 아름다운 소리. 그 심상은 잔인하고 냉혈적인 정치권력에 의해 박해받고 살육당한 사람들의 것이며, 아마도 선생 자신의 심상에 아프도록 공명한 것이리라. 콘서트가 끝나고 윤 선생 부부를 찾아갔다. 윤이상이라는 예술가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 정치와 예술이라는 가치 대립과 상극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동양적 전통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서양적 근대로 비약하지도 않으며, 정치냐 예술이냐 식의 양자택일을 하지도 않고 양자가 상극하는 고뇌 속에서 새로운 보편적 가치를 창조하려 한다. 그런 예술가의 얘기를 가까이서 듣고 싶다는 일념에서였다. 그 몇주 뒤에 <아사히 저널>(1984년 9월21일)이라는 잡지에 윤 선생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거기에는 음악 이야기뿐만 아니라 내 형들을 비롯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있던 모든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얘기도 들어 있었다. 모든 정치범의 석방이 실현될 때까지 한국 정부가 요청하는 자신의 귀국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 인터뷰는 당시 몹시 지치고 제한된, 시간의 1분1초까지 작곡을 위해 쓰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했을 때 한 것이다. 게다가 한국 정부의 비위를 거슬러 귀향의 꿈이 또다시 멀어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로 위촉받은 오페라 <심청>(1971/72)이 성공한 뒤 한국 정부는 윤 선생을 초청했다. 그것은 동베를린 사건 이후 첫 귀향과 명예회복의 기회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고 선생은 귀국을 단념했다. 1988년에 노태우 정권이 등장했을 때 선생은 휴전선에서 남북 공동음악제를 열자고 제창했다. 그러나 그 음악제는 결국 한국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김영삼 문민정권 탄생을 전후해 윤이상 음악을 터부시하는 풍조도 완화됐고 1994년 9월 ‘윤이상 음악제’ 기획이 추진됐다. 그러나 “과거 행동에 반성할 만한 점도 있었다”, “앞으로 일절 북과는 관계를 끊겠다”는 뜻을 표명하라는 한국 정부 쪽의 요구를 거절하고 선생은 또다시 귀국을 단념했다. 그 뒤 선생은 미국에서 남북 음악가들을 모아 음악제를 여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북쪽 음악가들이 참가를 취소함으로써 그것도 실현되지 못했다. 윤 선생의 마지막 작품은 교향시 <불길에 휩싸인 천사들>(1994)이다. 노태우 정권의 탄압에 항의해 잇따라 분신자살한 젊은이들을 추념하는 음악이다. 1995년 12월20일, 선생의 유해는 베를린 묘지에 안장됐다. 해방을 갈망했으나 거기까지는 차마 가닿지 못한 상처 입은 용의 생애였다. 선생의 후두부에 큰 거미나 게가 달라붙어 있는 듯한 상흔이 있었다. 1967년 7월 동베를린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옥중에서 자살을 시도하면서 고문실에 있던 무거운 금속제 재떨이로 자신의 후두부를 내려친 상흔이다. 고문실에서의 굴욕, 고통, 절망이 얼마나 혹독했겠는가. 이 위대한 예술가는 자민족의 국가권력에 의해 말살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생은 그 심연에서 생환했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놀랍게도 더욱 거대한 존재로 재생했다. 지금 한국에서 그의 탄생 100주년이 어떻게 얘기되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이런 경위를 깊은 고통, 부끄러움과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권 시절의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윤이상 평화재단’도 올라 있었다고 한다. 그 리스트를 만든 자들은 그의 음악을 단 한번만이라도 진지하게 들어본 적이 있을까. 도대체 어느 세월에 이런 수치스러운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번역 한승동/독서인
칼럼 |
[서경식 칼럼] 아직은 잊어도 좋을 때가 아니다! -윤이상 탄생 100주년 |
윤이상의 생애는 절대적인 해방의 환희에 겨우 4분의 1음을 남기고 도달하지 못하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또 그것은 그 개인의 좌절의 역사라기보다 우리 민족의 경험을 상징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4분의 1음이라는 근소한 간극이 만들어내는 음의 울림이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美)을 낳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올해는 작곡가 윤이상의 탄생 100주년이다. 독일에서는 9월에 기념 콘서트와 심포지엄이 열렸다. 일본에서는 11월18일 조키 세이지 도쿄대 교수 주관 아래 기념 심포지엄이 열려 나도 초청 연사로 참석했다. 윤이상이 태어난 건 1917년. 1995년에 객지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78년 생애 가운데 앞 3분의 1은 식민지시대, 나머지 3분의 2는 ‘분단시대’였다. 윤이상은 사회생활이나 예술에서 근원적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삶을 일관되게 살았다. 그것은 그의 예술의 본질이었다. ‘분단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일촉즉발의 제2차 조선(한국)전쟁 위기마저 임박한 상황이다. 아직은 우리가 윤이상을 잊어도 좋을 때가 아니다. 1951년생인 나는 일본에서 접한 동베를린 사건(1967년) 보도를 통해 윤이상이라는 존재를 알았다. 그 3, 4년 뒤 모국 한국에 유학중이던 나의 두 형(서승, 서준식)이 ‘학원침투 간첩단’ 혐의로 체포당했고, 윤이상의 운명은 돌연 나에게 현실감을 띠게 됐다. 1981년 5월13일 도쿄에서 <상처 입은 용>(루이제 린저와의 대담) 일본어판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광주 5·18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그때 나의 형들은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 실로 암흑시대였다. 그때 처음 가까이서 선생의 얼굴을 뵈었으나 긴장한 탓에 아무 말도 걸지 못했다. 그렇게 만난 <상처 입은 용>은 내 인생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책이 됐다. 이 책은 어머니가 윤 선생을 뱄을 때 꾼 태몽 이야기로 시작한다. 지리산 상공을 용이 날아가는 꿈. 하지만 그 용은 상처를 입어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고 발버둥 쳐도 그럴 수 없었다. 이 얼마나 웅혼하고 신화적인 이미지인가. 게다가 그 용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얼마나 예언적인가. 그 이미지는 선생이 동베를린 사건으로 투옥당했다가 석방된 지 10년 가까이 지난 뒤 첼로 협주곡(1975/76)으로 열매를 맺었다. “저 종말부의 옥타브 도약을 떠올려 보세요. 그 도약은 자유, 순수, 절대를 향한 희구와 바람을 의미합니다. 오케스트라에서는 오보에가 G#(지 샤프)음에서 A음까지 활주음(글리산도)으로 올라가고, 이 A음을 트럼펫이 이어받습니다. 첼로는 거기까지 도달하려 하지만 좀체 갈 수 없습니다. 첼로는 글리산도로 G#음에서 4분의 1음만큼의 높이까지 올라가지만 그 이상은 올라갈 수 없습니다.” 어느 예술가가 “꿈이 인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꿈을 모방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실로 윤이상의 생애는 이 꿈처럼 절대적인 해방의 환희에 겨우 4분의 1음을 남기고 도달하지 못하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또 그것은 그 개인의 좌절의 역사라기보다 우리 민족의 경험을 상징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4분의 1음이라는 근소한 간극이 만들어내는 음의 울림이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美)을 낳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1983년 늦가을, 처음으로 서베를린의 선생 댁을 찾아갔다. 선생의 부인 이수자씨는 광주사건 때 “선생님이 텔레비전 보도를 보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셨던지”라며 말했다. “울면서 작곡하셨다.” 1984년, 일본 군마현에서 열린 구사쓰(草津)국제아카데미 초대 작곡가는 윤 선생이었다. 그해 8월24일에 ‘윤이상의 저녁’ 콘서트가 열렸고 나도 교토에서 달려갔다. 그날 연주된 다섯 곡 중 첫 곡은 ‘이마주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1968)으로, 북을 방문했을 때 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고분벽화를 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북에 갔다는 선생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꼭 이 음악을 들어보시기 바란다. 운이 좋으면, 자신이 오랜 왕묘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에 사로잡힐 것이다. 다섯 곡 중 마지막 곡은 “울면서 작곡했다”는 ‘밤이여, 나뉘어라(Teile dich Nacht)―소프라노와 실내악을 위한’(1980)이었다. 넬리 작스의 시를 활용한 것이다. 작스는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한 유대계 여성 시인이다. 피해망상과 정신착란으로 고생하다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 시구의 마지막. “나뉘어라 밤이여/ 너의 두 날개는 부들부들 떨고 있구나// 내가 가서/ 피투성이 저녁을/ 되찾아 오마” 이 구절이 지극히 고음의 소프라노로 비명처럼, 또한 속삭임이나 한숨처럼 울려퍼지면서 허공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참으로 비통하고, 아름다운 소리. 그 심상은 잔인하고 냉혈적인 정치권력에 의해 박해받고 살육당한 사람들의 것이며, 아마도 선생 자신의 심상에 아프도록 공명한 것이리라. 콘서트가 끝나고 윤 선생 부부를 찾아갔다. 윤이상이라는 예술가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 정치와 예술이라는 가치 대립과 상극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동양적 전통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서양적 근대로 비약하지도 않으며, 정치냐 예술이냐 식의 양자택일을 하지도 않고 양자가 상극하는 고뇌 속에서 새로운 보편적 가치를 창조하려 한다. 그런 예술가의 얘기를 가까이서 듣고 싶다는 일념에서였다. 그 몇주 뒤에 <아사히 저널>(1984년 9월21일)이라는 잡지에 윤 선생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거기에는 음악 이야기뿐만 아니라 내 형들을 비롯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있던 모든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얘기도 들어 있었다. 모든 정치범의 석방이 실현될 때까지 한국 정부가 요청하는 자신의 귀국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 인터뷰는 당시 몹시 지치고 제한된, 시간의 1분1초까지 작곡을 위해 쓰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했을 때 한 것이다. 게다가 한국 정부의 비위를 거슬러 귀향의 꿈이 또다시 멀어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로 위촉받은 오페라 <심청>(1971/72)이 성공한 뒤 한국 정부는 윤 선생을 초청했다. 그것은 동베를린 사건 이후 첫 귀향과 명예회복의 기회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고 선생은 귀국을 단념했다. 1988년에 노태우 정권이 등장했을 때 선생은 휴전선에서 남북 공동음악제를 열자고 제창했다. 그러나 그 음악제는 결국 한국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김영삼 문민정권 탄생을 전후해 윤이상 음악을 터부시하는 풍조도 완화됐고 1994년 9월 ‘윤이상 음악제’ 기획이 추진됐다. 그러나 “과거 행동에 반성할 만한 점도 있었다”, “앞으로 일절 북과는 관계를 끊겠다”는 뜻을 표명하라는 한국 정부 쪽의 요구를 거절하고 선생은 또다시 귀국을 단념했다. 그 뒤 선생은 미국에서 남북 음악가들을 모아 음악제를 여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북쪽 음악가들이 참가를 취소함으로써 그것도 실현되지 못했다. 윤 선생의 마지막 작품은 교향시 <불길에 휩싸인 천사들>(1994)이다. 노태우 정권의 탄압에 항의해 잇따라 분신자살한 젊은이들을 추념하는 음악이다. 1995년 12월20일, 선생의 유해는 베를린 묘지에 안장됐다. 해방을 갈망했으나 거기까지는 차마 가닿지 못한 상처 입은 용의 생애였다. 선생의 후두부에 큰 거미나 게가 달라붙어 있는 듯한 상흔이 있었다. 1967년 7월 동베를린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옥중에서 자살을 시도하면서 고문실에 있던 무거운 금속제 재떨이로 자신의 후두부를 내려친 상흔이다. 고문실에서의 굴욕, 고통, 절망이 얼마나 혹독했겠는가. 이 위대한 예술가는 자민족의 국가권력에 의해 말살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생은 그 심연에서 생환했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놀랍게도 더욱 거대한 존재로 재생했다. 지금 한국에서 그의 탄생 100주년이 어떻게 얘기되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이런 경위를 깊은 고통, 부끄러움과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권 시절의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윤이상 평화재단’도 올라 있었다고 한다. 그 리스트를 만든 자들은 그의 음악을 단 한번만이라도 진지하게 들어본 적이 있을까. 도대체 어느 세월에 이런 수치스러운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번역 한승동/독서인
도쿄경제대 교수 올해는 작곡가 윤이상의 탄생 100주년이다. 독일에서는 9월에 기념 콘서트와 심포지엄이 열렸다. 일본에서는 11월18일 조키 세이지 도쿄대 교수 주관 아래 기념 심포지엄이 열려 나도 초청 연사로 참석했다. 윤이상이 태어난 건 1917년. 1995년에 객지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78년 생애 가운데 앞 3분의 1은 식민지시대, 나머지 3분의 2는 ‘분단시대’였다. 윤이상은 사회생활이나 예술에서 근원적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삶을 일관되게 살았다. 그것은 그의 예술의 본질이었다. ‘분단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일촉즉발의 제2차 조선(한국)전쟁 위기마저 임박한 상황이다. 아직은 우리가 윤이상을 잊어도 좋을 때가 아니다. 1951년생인 나는 일본에서 접한 동베를린 사건(1967년) 보도를 통해 윤이상이라는 존재를 알았다. 그 3, 4년 뒤 모국 한국에 유학중이던 나의 두 형(서승, 서준식)이 ‘학원침투 간첩단’ 혐의로 체포당했고, 윤이상의 운명은 돌연 나에게 현실감을 띠게 됐다. 1981년 5월13일 도쿄에서 <상처 입은 용>(루이제 린저와의 대담) 일본어판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광주 5·18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그때 나의 형들은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 실로 암흑시대였다. 그때 처음 가까이서 선생의 얼굴을 뵈었으나 긴장한 탓에 아무 말도 걸지 못했다. 그렇게 만난 <상처 입은 용>은 내 인생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책이 됐다. 이 책은 어머니가 윤 선생을 뱄을 때 꾼 태몽 이야기로 시작한다. 지리산 상공을 용이 날아가는 꿈. 하지만 그 용은 상처를 입어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고 발버둥 쳐도 그럴 수 없었다. 이 얼마나 웅혼하고 신화적인 이미지인가. 게다가 그 용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얼마나 예언적인가. 그 이미지는 선생이 동베를린 사건으로 투옥당했다가 석방된 지 10년 가까이 지난 뒤 첼로 협주곡(1975/76)으로 열매를 맺었다. “저 종말부의 옥타브 도약을 떠올려 보세요. 그 도약은 자유, 순수, 절대를 향한 희구와 바람을 의미합니다. 오케스트라에서는 오보에가 G#(지 샤프)음에서 A음까지 활주음(글리산도)으로 올라가고, 이 A음을 트럼펫이 이어받습니다. 첼로는 거기까지 도달하려 하지만 좀체 갈 수 없습니다. 첼로는 글리산도로 G#음에서 4분의 1음만큼의 높이까지 올라가지만 그 이상은 올라갈 수 없습니다.” 어느 예술가가 “꿈이 인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꿈을 모방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실로 윤이상의 생애는 이 꿈처럼 절대적인 해방의 환희에 겨우 4분의 1음을 남기고 도달하지 못하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또 그것은 그 개인의 좌절의 역사라기보다 우리 민족의 경험을 상징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4분의 1음이라는 근소한 간극이 만들어내는 음의 울림이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美)을 낳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1983년 늦가을, 처음으로 서베를린의 선생 댁을 찾아갔다. 선생의 부인 이수자씨는 광주사건 때 “선생님이 텔레비전 보도를 보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셨던지”라며 말했다. “울면서 작곡하셨다.” 1984년, 일본 군마현에서 열린 구사쓰(草津)국제아카데미 초대 작곡가는 윤 선생이었다. 그해 8월24일에 ‘윤이상의 저녁’ 콘서트가 열렸고 나도 교토에서 달려갔다. 그날 연주된 다섯 곡 중 첫 곡은 ‘이마주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1968)으로, 북을 방문했을 때 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고분벽화를 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북에 갔다는 선생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꼭 이 음악을 들어보시기 바란다. 운이 좋으면, 자신이 오랜 왕묘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에 사로잡힐 것이다. 다섯 곡 중 마지막 곡은 “울면서 작곡했다”는 ‘밤이여, 나뉘어라(Teile dich Nacht)―소프라노와 실내악을 위한’(1980)이었다. 넬리 작스의 시를 활용한 것이다. 작스는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한 유대계 여성 시인이다. 피해망상과 정신착란으로 고생하다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 시구의 마지막. “나뉘어라 밤이여/ 너의 두 날개는 부들부들 떨고 있구나// 내가 가서/ 피투성이 저녁을/ 되찾아 오마” 이 구절이 지극히 고음의 소프라노로 비명처럼, 또한 속삭임이나 한숨처럼 울려퍼지면서 허공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참으로 비통하고, 아름다운 소리. 그 심상은 잔인하고 냉혈적인 정치권력에 의해 박해받고 살육당한 사람들의 것이며, 아마도 선생 자신의 심상에 아프도록 공명한 것이리라. 콘서트가 끝나고 윤 선생 부부를 찾아갔다. 윤이상이라는 예술가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 정치와 예술이라는 가치 대립과 상극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동양적 전통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서양적 근대로 비약하지도 않으며, 정치냐 예술이냐 식의 양자택일을 하지도 않고 양자가 상극하는 고뇌 속에서 새로운 보편적 가치를 창조하려 한다. 그런 예술가의 얘기를 가까이서 듣고 싶다는 일념에서였다. 그 몇주 뒤에 <아사히 저널>(1984년 9월21일)이라는 잡지에 윤 선생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거기에는 음악 이야기뿐만 아니라 내 형들을 비롯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있던 모든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얘기도 들어 있었다. 모든 정치범의 석방이 실현될 때까지 한국 정부가 요청하는 자신의 귀국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 인터뷰는 당시 몹시 지치고 제한된, 시간의 1분1초까지 작곡을 위해 쓰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했을 때 한 것이다. 게다가 한국 정부의 비위를 거슬러 귀향의 꿈이 또다시 멀어질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로 위촉받은 오페라 <심청>(1971/72)이 성공한 뒤 한국 정부는 윤 선생을 초청했다. 그것은 동베를린 사건 이후 첫 귀향과 명예회복의 기회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고 선생은 귀국을 단념했다. 1988년에 노태우 정권이 등장했을 때 선생은 휴전선에서 남북 공동음악제를 열자고 제창했다. 그러나 그 음악제는 결국 한국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김영삼 문민정권 탄생을 전후해 윤이상 음악을 터부시하는 풍조도 완화됐고 1994년 9월 ‘윤이상 음악제’ 기획이 추진됐다. 그러나 “과거 행동에 반성할 만한 점도 있었다”, “앞으로 일절 북과는 관계를 끊겠다”는 뜻을 표명하라는 한국 정부 쪽의 요구를 거절하고 선생은 또다시 귀국을 단념했다. 그 뒤 선생은 미국에서 남북 음악가들을 모아 음악제를 여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북쪽 음악가들이 참가를 취소함으로써 그것도 실현되지 못했다. 윤 선생의 마지막 작품은 교향시 <불길에 휩싸인 천사들>(1994)이다. 노태우 정권의 탄압에 항의해 잇따라 분신자살한 젊은이들을 추념하는 음악이다. 1995년 12월20일, 선생의 유해는 베를린 묘지에 안장됐다. 해방을 갈망했으나 거기까지는 차마 가닿지 못한 상처 입은 용의 생애였다. 선생의 후두부에 큰 거미나 게가 달라붙어 있는 듯한 상흔이 있었다. 1967년 7월 동베를린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옥중에서 자살을 시도하면서 고문실에 있던 무거운 금속제 재떨이로 자신의 후두부를 내려친 상흔이다. 고문실에서의 굴욕, 고통, 절망이 얼마나 혹독했겠는가. 이 위대한 예술가는 자민족의 국가권력에 의해 말살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생은 그 심연에서 생환했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놀랍게도 더욱 거대한 존재로 재생했다. 지금 한국에서 그의 탄생 100주년이 어떻게 얘기되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이런 경위를 깊은 고통, 부끄러움과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권 시절의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윤이상 평화재단’도 올라 있었다고 한다. 그 리스트를 만든 자들은 그의 음악을 단 한번만이라도 진지하게 들어본 적이 있을까. 도대체 어느 세월에 이런 수치스러운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번역 한승동/독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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