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4.24 19:34
수정 : 2017.04.25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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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 광고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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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음악에 글자만 명멸하는 구성
‘장영혜중공업’ 웹아트 작업과 비슷
예술계 “베끼기·노이즈마케팅” 비난
안후보 쪽 “타 광고에서도 활용”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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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 광고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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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유력주자인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와, 한국 미술판의 유명작가 장영혜중공업은 어떤 관계일까. 그들은 서로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영감과 조언을 주고받는 사이일까.
지난 주말부터 안 후보의 티브이 홍보영상이 방영되면서 미술판에서 쏟아져나오는 물음이다. 안 후보의 얼굴은 하나도 나오지 않고, 초록빛의 큰 고딕체로 ‘IT(아이티)전문가’, ‘역전의 명수’, ‘대통령 후보 안철수’라는 글자와 문장만 경쾌한 타악 리듬 아래 명멸하는 이 홍보영상이, 삼성그룹과 정치인을 까발려온 장영혜중공업의 웹아트 작업들과 쌍둥이처럼 빼닮았기 때문이다. 글자들의 배경색이 초록색이고, 안 후보 홍보문구가 쓰여 있다는 것을 빼고는 사실 뚜렷한 차이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 편이다. 실제로 페이스북, 인터넷 블로그와 카페 등에서는 지난 1~3월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작가의 개인전 출품작들과 안 후보 홍보동영상을 비교하면서 ‘베끼기’, ‘카피’라고 비판하는 글들이 줄을 잇고 있다.
장영혜중공업은 1999년 장영혜 작가와 미국인 동료작가 마크 보주가 결성한 듀오 예술그룹이다. 2000년 북한 정권과 남한 재벌들을 풍자하는 그들 특유의 냉소적인 웹사이트 문자 작업들로 초대 에르메스미술상을 수상하면서 유명해졌다. 웹의 가상 환경에서 떠들썩한 타악, 재즈 음악을 배경으로 삼성에 포획된 우리 일상을 담은 자극적인 속어투성이 문장들이 명멸하는 작품을 계속 만들어왔다. 연초 아트선재센터에서 선보인 신작전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에서도 이들은 가족과 삼성, 한국 정치인들을 까발리는 현란한 독설과 시끄러운 음악, 영상을 섞은 웹아트를 선보여 눈길을 끈 바 있다.
논란이 된 안 후보 홍보영상은 광고디자이너인 이제석 광고연구소 대표가 만든 작품이다. 앞서 팔을 벌린 안 후보의 유세 이미지를 선거포스터에 넣어 화제를 모았던 그는 이번 홍보영상에서도 글자의 폰트와 음악만이 빠른 속도로 난무하고 명멸하는 색다른 구성을 내놓았다. 그는 지난 21일 한 일간지와 한 인터뷰에서 이번 작업을 이렇게 자평했다. “일부 창작자들, 기획자들은 무력감마저 느끼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전망은 자신감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이렇게 해도 되는데 여태껏 우리는 왜 이런 방식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느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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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혜중공업 넷아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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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부 미술인들은 이 작품이 장영혜중공업 특유의 현실비판적 웹아트 작업의 구성을 사실상 거의 그대로 옮겨 만들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글자 폰트나 글자들이 명멸하는 텍스트 흐름 등에서 명백한 ‘베끼기’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콜럼버스의 달걀을 운운할 만큼의 새로움이나 발상의 전환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저질의 노이즈마케팅”이라는 비난도 나왔다. 현재 한국미술계 대표 작가로 꼽히는 정연두씨는 “의도인지 무지인지 모르겠지만, 장영혜중공업 작품을 색깔만 바꿔 그대로 베껴서 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1990년대말 영국의 사치 광고사가 현지 영상작가 질리언 웨어링의 작품을 노골적으로 티브이 광고에 베껴 써 논란이 빚어진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이렇게 노골적으로 미술가의 작품을 차용한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웬만한 유사성은 작가들이 참는 편인데, 이건 너무 심하다”고 꼬집었다.
이에 이제석씨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장영혜중공업의 작업은 본 적이 있지만,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화면에 가득한 글자들이 명멸하는 방식은 애플사의 아이폰 광고나 여러 상업광고 영상 등에서 오래전부터 숱하게 활용되었고, 표절을 거론할 수 없을 만큼 평범하고 보편적인 방식인데 대선이다 보니 특별하게 보이는 것”이라며 “논의할 만한 거리가 아예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장영혜중공업의 작업은 디지털 가상공간의 가벼움이라는 매체적 속성을 통해, 경쾌하면서도 신랄한 어조로 현실과 정치에 관한 비판적 메시지를 던진다는 특성을 지닌다. 형식의 파격성과 메시지 전달력이 돋보이는 이들의 작업은 2000년대 이후 국내 미술판의 작가들과 광고계 등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게 중론이다. 작품의 원본성을 따지기보다 소통과 역설을 즐기는 미디어아티스트란 점에서 안 후보 쪽의 베끼기 논란에 이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관심을 모으는 부분이다. <한겨레>는 장영혜중공업 쪽에 전자우편을 보내 이 홍보영상에 대한 생각을 물었으나 답변은 오지 않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민의당,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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