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조세영 국립외교원장
한·일정보협정 밀실 처리 파문으로
외교부 떠난 뒤 외교원장으로 복귀
최악의 한일관계 상황에서 들은
한국 외교 대표적 ‘일본통’의 고언
“한·일 ‘65년 체제’ 지탱한 두 기둥
경제·안보협력으론 관계 지탱 난망
양국이 추구하는 방점 다르더라도
대결 종식과 평화 위한 협력 필요”
▶ 대법원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과 화해와치유재단 해산에 대한 일본의 반발이 계속되면서 한·일관계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뒤 최악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한국 외교의 대표적 일본통으로 꼽히는 조세영 국립외교원장을 만나 한·일관계를 풀어가는 원칙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주중국·주일본대사관 공사참사관, 동북아시아국장, 동서대 국제학부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등을 역임한 그는 지난 9월27일 국립외교원장에 임명됐다. 임명 뒤 그의 첫 언론 인터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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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영 국립외교원장이 11월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국립외교원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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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영 국립외교원장은 한국 외교를 대표하는 ‘일본통’으로 꼽힌다. 1984년부터 30년 넘게 한·일관계의 최전선에 있었다. 동북아시아 국장으로 일하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밀실 처리 파문’에 휘말려 고초도 겪었다. 2013년 돌연 외교부를 떠나 ‘자유인’을 선언했다. 부산 동서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글 쓰며 ‘자유로운 문필활동가’로 살았다. <한겨레> 토요판에 ‘외교클럽’(2016년 3월~2017년 2월)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가 5년 만에 다시 외교관으로 돌아왔다. 외교부 산하 연구기관이자 외교관 양성 교육기관인 국립외교원의 원장을 맡았다. 그에게 인터뷰를 청한 것은 최악의 한·일관계에 대해 일본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11월30일 서울 서초동 국립외교원에서 조 원장을 만났다. 그는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신중했고, 동아시아 새 질서에 대해서는 과감한 비전을 펼쳤으며, ‘외교관 학교 교장’의 삶에는 열정적이었다.
“청구권 협정 부정 않는 해법 필요”
―외교부를 떠나 교수이자 ‘문필활동가’로 살다가 다시 외교관으로 돌아온 소감은?
“6년 만에 외교부 실·국장 회의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분위기가 너무 딱딱했다. 밖에서 민간인으로 살다보니 안에 있을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정체성 혼란이 가장 심한 부처가 외교부다. 이전에 외교는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특별한 영역으로 인정 받았지만, 이제 모든 부처가 외교 기능을 하고 민간에도 인재들이 많다. 외교부가 과감하게 문호를 개방하고, 인사 교류해서, 이질적인 구성원과 섞여서 일하며 서로 자극받고 발전하면서 사회 일반의 눈높이와 맞춰야 한다.”
―최근 베트남전쟁에 대한 <적과의 대화>라는 책의 한글판 재출간을 주선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뜻이 담겼나?
“외교관 시절에 가장 감명 깊게 읽고 후배나 동료에게 수없이 권한 책인데, 절판돼 안타까움을 느끼다가 동서대에 이 책의 지은이를 초청한 것을 계기로 출간을 주선하게 됐다. 베트남전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가 베트남과 미국이 수교한 뒤인 1997년 6월 미국 정책결정자들과 함께 하노이로 가서 베트남 정책결정자들과 사흘간 대화한 기록이다. 그래서 적과의 대화다. 마지막날 맥나마라가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며, 첫째는 ‘적을 이해해라’, 둘째는 ‘적이라도 대화하라’고 말한다. 이 두 가지야말로 외교의 요체다. 현재 한반도 상황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북한의 발상과 사고 회로를 이해해야 어떤 협상전략이 적절한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화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 의도를 오판하지 않는다. 베트남전 당시 미국은 북베트남에 집중 폭격을 하면서도 수면 아래에서 비밀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하노이에서 맥나마라 등은 ‘그때 왜 당신들은 비밀접촉에 응하지 않았냐’고 한다. 베트남 쪽 참가자들은 ‘당신들이 수도 하노이를 집중 공습하면서 대화를 제의하면 어떻게 믿겠냐’고 했다. 우리 상황에 딱 맞는 이야기다. 북한과 협상하면서, 최대 압박을 구사해야 한다든지, 제재 완화해선 안 된다든지 하고 있지 않나.”
대법원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과 화해와치유재단 해산에 대한 일본의 반발이 계속되면서, 한·일관계가 칠흙같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뒤 최악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조 원장은 자신이 직접 정책을 담당하지 않아 당사자에게 누가 된다면서, 구체적인 해법보다는 기억해야 할 원칙들을 이야기했다.
―겹겹히 얽힌 한·일관계는 어떤 원칙을 가지고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일제 강점기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 판결은 ‘식민지배는 불법에 기초하기 때문에 강제징용도 불법’이라고 했고, 한국 정부도 그 판단을 존중한다. 구체적 해법은 정부 내에서 민간 전문가들을 포함해 다양한 의견들을 들으면서 모색하고 있다. 큰 틀에서 대법원 판결문도 ‘65년 체제’(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약 체결 뒤 한·일관계)나 청구권 협정을 부정하는 건 아니라고 이해한다. 청구권협정의 토대를 부정하지 않고 그 토대 위해서 해법을 모색하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일본과 외교 협상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현재로서는 관계 부처, 민간 전문가의 지혜를 모으면서 해법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피해자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관심이 부족했던 우리 자신을 한번 더 돌아보는 자세도 필요하다. 일본에서 ‘국제법을 무시한 판결’ 등의 언사가 나오는 것은 한국 안에서 차분히 해법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한·일 외교 당국간 깊은 소통을 유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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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영 국립외교원장이 11월30일 <한겨레>와 인터뷰하며 악화된 한·일관계의 해법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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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는 외교협상 아닌 인권의 문제”
―이번 대법원 판결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약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한국 내에서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지 않은 전후 처리 문제를 짚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져왔는데.
“한·일관계가 시대적 전환기에 왔다는 느낌이다. 65년 체제가 ‘제도 피로’를 일으키고 있다. 그 틀로 한·일관계를 지탱하기 쉽지 않은 상황을 맞고 있다. 65년 체제가 완결된 게 아니라 이후 끊임없이 수정 보완됐다는 주장도 있다. 65년 국교정상화 당시 맺은 어업협정은 한번 파기되고 새로운 협정으로 대체됐다. 65년 협정에 과거사 사죄 반성이 포함돼 있지 않았는데, 1998년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공동선언 때 일본이 정식으로 과거사에 대한 인식을 밝혔다. 그런 면에서 청구권 협정도 완벽하지 않으며, 불완전한 부분을 극복하는 노력을 통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1990년대에 처음으로 문제제기를 한 이후 아시아여성기금과 화해와치유재단이라는 해법이 두 번 다 실패했다. 이제 어떤 해법이 있을 수 있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실리보다는 명분이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것을 양국 외교협상을 통해 타협책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풀려고 한 게 문제였다. 대통령께서 재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도 그런 판단에 기초한 것이다. 양국의 외교적 협상보다는 국제적인 인권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 현명하다. 지난 6월 외교부가 ‘여성과 함께하는 평화 이니셔티브’를 발표했는데,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더 이상 양국 외교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전시 여성 성폭력의 문제임을 명확히 하고, 국제적인 인권 문제, 보편가치의 문제로 한 단계 높이 승화시킨다는 발상이다.”
―강제징용과 관련해 일본은 교전국이었던 중국과 식민지였던 한국은 다르다고 한다. 아베 담화 등을 보면 서구 열강도 다 식민지배를 했고 일본의 식민지배도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태도가 드러난다. 일본의 ‘혐한’ 감정도 우려스럽다.
“한·일청구권 협정을 맺은 지 50년이 넘었다. 국제사회에서 인권에 관한 생각에 많은 진전이 있었고 국제법도 그런 시대적 흐름에 맞춰 진화하고 있다. 과거 역사를 직시하는 것이 한·일 국교 정상화와 양국간 외교관계의 분명한 전제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일본 사회가 변했다. 1980년대 일본에서 교과서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근린제국조항(교과서 집필 때 침략전쟁 피해국들을 거스르는 조항을 넣지 못하게 한 규정)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조항을 얘기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내용도 많이 없어졌다. 그런 변화들이 한국과 일본 사이 협력의 폭과 깊이에 제약 요인이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다만 일본에도 과거 역사 반성을 포함해 한·일 우호 협력을 위해 많이 노력해온 사람들이 있다. 고노 담화, 김대중?오부치 선언, 식민지배의 강압적 성격에 대해서 이야기한 간 나오토 담화, 조선왕실도서 반환 등이 그들 노력의 결과다. 일본을 하나로만 보지 말고 그 안에 다양한 목소리와 세력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 북한의 경제발전 등을 위해서는 일본의 역할이 중요하다. 일본이 북한의 변화에 어떤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하는지.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일본의 북한에 대한 입장도 변했고, 아베 총리도 김정은 위원장과 직접 만나 대화로 풀겠다는 입장이다. 1990년대 초 주한 독일대사의 인터뷰 내용이 인상 깊었다. 독일 통일 마지막 단계에서 독일과 프랑스 정상이 매일 전화 통화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중요 국면에서 일본과의 긴밀한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고, 한·일관계도 이 목표에 맞춰 재설정할 필요성이 있다. 65년 체제를 50년 넘게 지탱한 두 개의 기둥이 있었다. 하나는 경제협력이고, 또 하나는 안보협력이었다. 한·일 간 경제 격차가 줄고, 냉전이 끝나 한국이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수교한 뒤에는 두 개의 기둥이 양국 관계의 갈등과 마찰을 조절하는 역할을 이전처럼 하지 못하게 됐다. 제3의 기둥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대결 종식과 평화를 위한 협력이야말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일을 연결시킬 유일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일본도 북한 문제가 중요하니까 협력하자고 하긴 하는데, 비핵화를 위한 억지력 강화에 방점을 둔다. 우리 입장에서는 대화와 연계를 통한 변화를 추구한다. 방점이 다르다. 그 차이를 줄이면서 어떻게 우리가 생각하는 한반도 평화 번영 질서 구축에 일본의 협력을 견인해낼 수 있을까가 한·일 협력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
“외교 기술자가 돼선 안 돼”
그가 외교부를 떠나게 된 계기는 이명박 정부 때인 2012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밀실 처리’ 파문이었다. 한국과 일본이 군사 정보를 직접 공유하는 이 협정은 가서명 뒤 2012년 6월 국무회의까지 통과됐으나, 밀실 추진이라는 비판 여론으로 막판에 무산됐다. 실무 책임자였던 조 원장이 책임을 떠안고 물러나야 했다.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 협정을 재추진해 2016년 11월23일 정식 체결했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문제로 외교부를 떠나야 했던 2012년 상황을 지금 돌아보면 어떤가.
“특별히 아쉬움도 불만도 없다.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기회가 됐으니까. 다만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필요하지만 민감한 문제인데, 국민들로부터 이해와 공감을 얻는 과정이 부족했다는 교훈을 얻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 외교정책과 미·중관계 갈등 고조 등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한국 외교의 핵심 과제는 무엇인가.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중심이 돼 건설한 자유주의 질서를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후 미국 스스로가 약화시키고 있다. 전통적인 동맹국들이 미국의 공약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국제정세의 큰 판이 변화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한반도에는 큰 기회가 열리고 있다. 그 속에서 북한 비핵화와 평화·번영의 질서를 세워야 한다. 북한 비핵화가 된다면 이 지역에 핵을 갖지 않는 남·북한과 일본이 존재하고, 그 주변에는 핵을 가진 미·중·러가 존재하는 현실이 등장하게 된다. 핵 국가와 비핵 국가가 공존하게 되는 지역에서 6개국의 안정적인 안보질서와 구조를 설계하는 전략적인 고민이 한국 외교에 필요하다.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도 그런 질서와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지가 북한 비핵화를 어떻게 달성할지보다 호흡이 긴 과제다.”
―어떤 원칙과 자세로 후배 외교관들을 길러내고 싶으신지?
“국립외교원장으로 오면서 설랬던 건 외교관 후보자 과정의 교육생들을 가르치는 교장이라는 역할 때문이었다. 교육생들을 만나서 ‘외교 기술자가 돼선 안 된다. 치열한 역사의식과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무장한 외교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교육생들은 1월3일 입교식 날 아침 현충원에 가서 순국선열에 참배하는데, 이번에는 오후에 덕수궁 옆 중명전 관람 일정을 추가했다. 중명전은 을사늑약을 체결한 곳이다. 부끄러운 외교의 현장이지만 옷깃을 여미고 치열한 역사 의식을 가져야 부끄러운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 실력 있는 외교가 국민에게 사랑받는 외교라고 생각한다.”
박민희 노지원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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