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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27 09:41 수정 : 2019.07.28 11:38

〔토요판〕 인터뷰
조선의 브리태니커 <임원경제지> 번역기

젊은 학자-후원자 만남의 결실
공돌이 출신 인문학자 정명현
논문 쓰다 <임원경제지>에 빠져

강남에서 학원 운영하는 송오현에
고민 끝에 13장 편지로 후원 요청
조건 없이 쾌히 수락…19억원 후원

2003년부터 작업해 12권 발간
2023년 67권 완역 목표로 매진

정명현 소장(왼쪽 둘째)을 비롯한 임원경제연구소 연구원들이 지난 23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임원경제연구소에서 그동안 번역 출간한 <임원경제지> 책을 들고 있다. 왼쪽부터 정정기 번역팀장, 정 소장, 민철기 선임연구원, 최시남 연구원. 파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번역은 글자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문명을 옮기는 것’이라는 신념 아래 조선시대 최고 백과전서인 <임원경제지>를 17년째 번역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최근 경제와 상업활동에 관한 <예규지> 2권을 출간했다. 총 67권(예상) 가운데 지금까지 12권이 나왔다. ‘임원경제연구소’ 사람들 중 초창기부터 청춘을 쏟아부은 4명의 학자를 지난 23일 경기도 파주의 임원경제연구소에서 만났다.

“…이 땅의 학인들이 좀 더 체계적이고 치밀한 스칼러십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주십시오. 지금 상태로는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학자가 나오기 힘듭니다. 이상하게도, 평생 돈 걱정 없이 공부만 할 수 있는 사람은 학문의 길에 좀처럼 들어서지 않습니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이 어려운 학문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제 주변 同學(동학) 대부분은 어렵게 어렵게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2002년 11월25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DYB최선어학원의 원장 송오현(53)은 ‘上望韓國之知的跳躍疏(대한민국의 지적인 도약을 갈망하는 상소문)’이라는 제목으로 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조선의 브리태니커’라는 별명을 가진, 우리나라 최고의 백과전서로 평가받는 <임원경제지>(별칭은 임원십육지)를 번역하는 데 필요한 후원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쓴 이는 대학원생(서울대 자연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박사과정)이던 정명현(50)이었다.

“임원경제지를 꼭 번역하고 싶은데 자금이 없잖아요. 번역 실적이 없어서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사업 응모에는 신청할 엄두를 못 냈어요. 독지가를 찾아야 하는데 제가 아는 분은 송 원장밖에 없었어요. 평소 그분이 지식 발전을 위한 사회적 기부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용기를 내 편지를 썼죠.” (정명현)

1년 예상했던 게 20년 작업으로

에이포(A4)용지 13장 분량의 편지를 다 읽자마자 송오현은 정명현에게 전화를 걸어 “임원경제지가 어떤 책인지도 모르고 번역의 세계도 모르지만, 이렇게라도 도와드릴 수 있다면 기꺼이 돕겠다”고 흔쾌히 수락했다. 송오현은 바로 3억원을 쾌척했다. 그는 지금까지 번역 과정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있다.

“정명현 소장이 대학을 졸업한 뒤 학비를 벌기 위해 1995년 여름부터 1년 반 동안 우리 학원에서 영어강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보니까 아이들을 정성으로 가르칠 뿐 아니라 정수기 종이컵을 아껴 쓸 정도로 인물 됨됨이가 훌륭했어요. 그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믿을 수 있겠다 싶어 도와드리겠다고 했죠. 사업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저도 늘 자금이 부족하긴 하지만, 이분들이 내는 책의 수준을 보니까 형편이 되면 더 보태드리고 싶어요.” (송오현, 25일 미국 출장 중 전화 인터뷰)

조선의 브리태니커라는 별명을 가진 <임원경제지>를 완역한다는 무모한 꿈은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완역의 계획 및 실행자인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 소장(오른쪽)과 후원자인 송오현 ‘DYB최선어학원’ 원장이 지난 2012년 6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임원경제지>(개관서) 출판기념회에서 만나 활짝 웃고 있다. 정명현 소장 제공
‘군자금’을 확보한 정명현은 동지 규합에 나섰다. 도올서원과 지곡서당(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을 같이 공부한 선후배와 동기들을 찾아다니며 임원경제지 완역을 해보자고 설득했다. 113권 54책(총 252만자로 논어의 160배 분량)으로 된 방대한 임원경제지는 그 양과 전문적인 내용 때문인지 당시까지 전혀 번역돼 있지 않았다. 정명현의 말에 공감한 소장학자 15명이 합류했다. 1명을 빼고는 모두 3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2003년 초부터 분야를 나눠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

“도올서원과 지곡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고전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았기에 두말 않고 수락했죠. 당시 막 결혼한 상태여서 한 달에 2백만원씩 월급이 나온다는 말에 혹하기도 했죠. 하하.” (정정기·48)

“1년쯤이면 끝날 거라는 정 소장의 말에 아르바이트나 하자는 생각에서 참여했죠. 그러다가 17년째 임원경제지와 씨름하고 있어요.” (최시남·51)

그 후 지금까지 번역에만 60명, 감수에 20명 등 모두 80명의 학자가 임원경제지 번역 출간 작업에 참여했다. 앞으로도 남은 분야 감수에 20명 정도가 더 필요하다.

임원경제지에 ‘미친’ 정명현은 본래는 과학키즈였다. 고교(광주 서강고) 때는 수학을 좋아했던 전형적인 이과생이었고, 1988년 공학도(고려대 유전공학과)가 된 뒤에는 생명과학에 심취했다. 하지만 대학 3학년 때 도올 김용옥의 <대화>에서 유전자 조작의 위험성을 비판하고 생명 윤리를 강조하는 대목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 도올서원 1기생(1994년)으로 한문 고전을 읽는 등 점차 관심사가 바뀌었다. 2001년 도올서원이 문 닫을 때까지 도반들과 중국과 우리나라 고전들을 읽으며 “역사와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개안”(정명현)을 얻었다. ‘일본 학계에서는 한 학자를 평가하는 데 있어 번역을 제일의 업적으로 평가한다’ ‘번역은 단순한 문자의 옮김이 아니라 문명의 옮김이다’ 등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도올의 가르침이 정명현을 사로잡았다. 그는 기숙형 한문 전수학교인 지곡서당을 거쳐 과학사를 공부하러 대학원(2000년)에 들어갔다.

“석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임원경제지를 처음 만났어요. 그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다시 들여다보니까 내용이 어마어마한 거예요. 국사책에 나오는 책인데도 한글로 번역된 적이 없어서 더 놀랐어요. 이거다 싶어서 도전에 나섰죠.” (정명현)

일반 독자들이 더 환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조선 후기 유학자이자 고위 관료를 지낸 풍석 서유구(1764~1845년)가 40년에 걸쳐 쓴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시골 또는 전원을 의미하는 임원(林園)에서 살아가는 선비들에게 필요한 각종 살림(경제)에 관한 생활 지식을 총망라했다. 농사에 관한 것(본리지 本利志)부터 시작해 식용식물 및 약용식물에 관한 내용(관휴지 灌畦志), 옷감의 직조와 염색에 관한 내용(전공지 展功志), 음식과 술 등 먹거리에 관한 것(정조지 鼎俎志), 의약에 관한 것(인제지 仁濟志), 주거생활과 건축·도구·일용품에 관한 것(섬용지 贍用志), 글씨와 그림, 활쏘기 등에 관한 것(유예지 遊藝志), 집터잡기와 집가꾸기에 관한 것(상택지 相宅志), 재산증식과 상업, 전국의 시장에 관한 것(예규지 倪圭志), 휴식과 오락, 취미생활에 관한 것(이운지 怡雲志) 등 모두 16개 분야(志)로 나뉘어 있다. 서유구는 이 책을 쓰면서 동의보감 등 우리나라 책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서적 등 모두 853종을 참고하고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했다.

여러 명이 나눠서 하면 1년 안에 번역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의욕에 넘쳤던 초짜 학자들은 얼마 안 가 막막한 벽에 부딪혔다. 내용이 매우 전문적이어서 글자는 알아도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대목이 너무 많았다. 또, 서울대 규장각본(규장각본)과 오사카 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본(오사카본), 고려대 도서관본(고려대본), 국립중앙도서관본(국립도서관본), 연세대도서관본(연세대본) 등 여러 필사본을 교감(서로 비교하면서 오류를 잡아내는 과정)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 과정에서 원본에 가장 가까운 필사본은 기존 통설(규장각본)과 달리 고려대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교감하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하나의 표현을 어떻게 우리말로 옮길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새 용어나 단어는 각 번역자마다 조금씩 달랐거든요. 그래서 담당자의 초벌 번역이 나오면 모든 팀원이 한 달에 한 번씩 전체 독회를 하면서 토론을 통해 최종적으로 확정했지요. 시간은 훨씬 더 걸렸지만, 번역 수준이 올라갔지요. 참여하는 저희도 배움이 늘어서 그만큼 보람이 있고요.”(민철기·48)

19세기 초반에 활약한 조선 지식인 중 정약용·이규경과 함께 3대 박학(博學)으로 꼽히는 풍석(楓石)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 <한겨레> 자료사진
임원경제지 번역서는 2008년 본리지 3권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섬용지 3권(2016), 유예지 3권(2017), 상택지 1권(2019), 예규지 2권(2019) 등 총 12권이 나왔다. 2023년까지 모두 67권(개관서 1권과 용어사전 3권 포함)을 펴낼 예정이다. 초벌 번역은 거의 이뤄진 상태라, 앞으로는 발간작업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자금이 모자라서 연구원들이 몇달 동안 무보수로 일하는 등 위기도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송오현이 구세주로 등장했다. 그는 2004년 3억원을 조건 없이 다시 내놓은 데 이어 2009년 8월에는 매달 1천만원씩을 기부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19억원을 지원했다. 임원경제연구소의 작업이 알려지면서 2013년부터는 교육부와 문체부 등 정부도 지원에 나섰다. 일반 개인들도 책을 예약 주문하는 형식으로 후원금을 보태고 있다.

“학자 등 각계 전문가들도 번역서를 반기고 있지만, 유기농업을 하는 농부나 요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 등 일반인들이 번역서가 나오면 토론회를 여는 등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어요. 번역서가 학문 발전뿐 아니라 서유구 선생이 목표로 했던 이용후생(利用厚生) 즉, 사람들의 실생활에 보탬이 되는 것 같아서 보람을 더 느낍니다. 이번 기회에 번역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제고됐으면 더 바랄 게 없지요.”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는 임원경제지 완역이 끝나면 서유구의 할아버지인 서명응(徐命膺, 1716~1787년)이 쓴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 번역에 나설 계획이다. 60권으로 된 보만재총서 역시 농학과 천문학, 경학 등 여러 분야의 학문이 망라돼 있다. 파주/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임원경제지> 저자 서유구 누구

‘곡식만 축내는 자’라며 선비 질타한 실학자

풍석 서유구(1764~1845년·그림)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산 정약용(1762~1836년)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둘 다 ‘이용후생’을 강조한 실학자이다. 정약용이 과거에 1년 먼저(1789년) 급제했지만, 두 사람은 정조가 젊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돼 규장각에서 함께 공부했다. 정조는 초계문신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시험을 봤는데, 그 중 <시경>의 590개 문제 중 모범답안으로 채택된 개수가 서유구는 181개(31%), 정약용은 117개(20%)였다.

귀양살이(다산)와 자진 사퇴(풍석)로 각각 18년간 공직을 떠나 있었던 것도 비슷하다. 이 기간에 다산은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등 제도 개선에 관한 주요 저작들을 대부분 완성했다. 그러나, 풍석은 고향인 경기도 파주 장단에서 직접 농사짓고, 물고기를 잡는 등 보통사람처럼 살았다. 직접 요리도 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경학과 경세학 즉, 관념적 학문을 “토갱지병 土羹紙餠”(흙으로 끓인 국·종이로 만든 떡), 선비들을 “헛되이 곡식만 축내면서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자”라고 비판했다.

나이 60살에 다시 관직에 복귀해 15년간 주요 관직에 있으면서는 구황작물인 고구마 재배법을 기록한 <종저보>를 편찬해 보급(1834년)하고, 가뭄을 극복할 수 있는 수차를 제작해 배급하기도 했다. 이처럼 백성 생활에 실제로 도움을 주려는 노력의 결정판은 <임원경제지> 저술이었다. 제조법이 잊혔던 명유(단청 위에 바르던 전통 유약)를 <임원경제지> 내용에 따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남기달 박사팀)이 몇 년 전 재현한 데서 보듯 이 책은 여전히 생생한 보물창고다.

그러나 <임원경제지>는 조선시대 당대에는 출간되지 못했다.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워낙 방대했지만, 나라에서는 관심이 없었다. 풍석은 자신의 묘표(묘비)에 “책을 진력으로 교정하고 이리저리 애썼는데, 모두 30여 년이 되었다. 이제 그 책이 완성되어서 죽기 전에 간행하자니 힘이 없고, 장독이나 덮자니 덮고 남을 책이 너무 많구나”라고 한탄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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