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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11 09:21 수정 : 2020.01.14 17:19

지난 7일 강원도 춘천시 자택이자 작업실에서 만난 박환 작가가 캔버스에 작업을 하고 있다. 박 화가는 “눈이 보이지 않는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이라며 “나는 그 불가능에 도전하는 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토요판] 인터뷰
시각장애인 화가 박환

지난 7일 강원도 춘천시 자택이자 작업실에서 만난 박환 작가가 캔버스에 작업을 하고 있다. 박 화가는 “눈이 보이지 않는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이라며 “나는 그 불가능에 도전하는 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림에 빠져 있을 땐 마치 앞이 훤히 보이는 듯 캔버스에 제가 막 색을 칠하고 있어요. 이쪽엔 나무고, 그 옆엔 집이니까 이게 무슨 색깔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한참 작업이 끝나면 ‘아, 나 안 보이지’란 자각이 들면서 탄식이 나와요. ‘어떡하나, 안 보여서…’ 이렇게요.”

박환(63) 화가는 앞을 보지 못한다. 7년 전 교통사고로 시각을 잃었다. 평생 그림으로 먹고살았던 그였다. 몇개월간 좌절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일어선 그는 연필 대신 핀과 실로 스케치하고, 손바닥 촉감으로 색을 구분해 그림을 그린다. 지난해에만 세번의 전시회를 열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눈으로 본인의 그림을 확인하지는 못한다. 한참 작업한 뒤 지금 그림이 완성된 것인지, 더 칠해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안 설 때가 많다. 그저 몰두했던 작품에서 마음이 떠날 때, 그때가 그림의 완성이다.

청력을 잃고 곡을 만든 작곡가 베토벤, 시력 잃고 명작을 그린 화가 밀레처럼 신체적 한계를 넘어 예술혼을 이어가는 한국의 시각장애인 화가가 있다. 그는 40여년 전부터 화가로 작품 활동을 했지만 2013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쳤다. 사고 이후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고 혀의 감각도 잃었다. 얼굴에는 많은 인공뼈가 박혔고, 말도 예전처럼 편하게 할 수 없다. 화가인 그에게 빛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시력 상실은 절망 그 자체였다.

그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채로 그림을 그린 지난 7년, 그는 네번의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개성있는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개발해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덕분이다. 지난달 20일부터 케이티앤지(KT&G)상상마당은 강원도 춘천시의 춘천 아트갤러리에서 박환 화가의 개인전 ‘박환: 끝나지 않은 여정’을 열고 오는 30일까지 22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중이다. 지역 예술에 이바지한 강원 지역 중견 작가들 가운데 박환 작가를 선정한 것이다. 지난 7일 <한겨레>는 박 화가의 자택이자 작업실에서 그의 작품 세계와 굴곡진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7년 전 사고로 시력 잃고도
네번째 개인전 여는 화가

나무, 청바지로 입체적 작품
선 경계 없는 환상적 화풍

“보이지 않는데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대한 끝없는 도전”

박환 작가가 캔버스에 작업을 하고 있다.
나무, 청바지, 진흙으로 그리는 그림

“오빠, 오늘은 비가 와서 날씨가 흐려. 거실 창문 밖에 산이 보이지 않는 날이야.”(여동생)

“그렇구나.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톡톡톡톡… 옆에서 이런 소리가 나는데.”(박 화가)

“기자님 노트북 소리야. 지금은 글씨로 일일이 쓰는 게 힘들잖아. 노트북으로 오빠 말을 받아 적는 거야.”(여동생)

“그런가. 이게 무슨 소리일까 궁금했어.”(박 화가)

앞산이 훤히 내다보이는 아파트 거실 창문가에는 이젤이 놓여 있었다. 스케치 작업이 한창인 캔버스엔 십여개의 핀이 꽂혀 있고 굵기가 다른 무명실이 이리저리 붙어 있다. 꽂힌 핀 사이 간격으로 거리를 파악하고 실을 붙여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가 연필 대신 착안해낸 스케치 방법이다. 물감은 손으로 만져 기름기의 점도로 색을 구분한 뒤 화폭에 칠한다.

박 화가는 캔버스에 나무껍질, 청바지 조각, 무명실, 진흙 등을 붙여 입체감 있는 그림을 그린다. 어떻게 하면 개성있게 표현할까 고민하다 시각을 잃기 전부터 시작한 일이다. “물감을 칠해도 영 새롭지가 않고 더 새로운 게 뭘까 늘 고민했죠. 어느 날 점심 먹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발로 돌멩이를 찼는데, 그게 도르르 굴러가더니 나무에 부딪쳤어요. 나무껍질이 눈에 보이길래 조금 뜯어와 집 지붕을 그린 곳에 붙여봤는데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박 화가의 말이다. 그는 물감 없이도 오묘한 자연 빛깔을 내는 나무껍질이 매력적인 재료라고 했다. 세월이 흐르며 색이 바랜 나무, 곰팡이가 슨 나무, 새카맣게 그을린 나무 등 환경에 따라 묘하게 달라진 나무의 색과 결을 고르고 골라 캔버스에 잘라 붙인다. 또 다른 주재료인 청바지도 마찬가지다. 주변에서 청바지를 구해 오면 박 화가는 “무슨 색이야?”라고 묻는다. 진한 청, 검정 청, 연한 청 색깔을 고려하고 재질을 따져 조각조각 작게 오린 뒤 나무줄기나 집 지붕을 표현하는 데 사용한다.

오직 손바닥 촉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 7~8점의 작품을 동시에 작업한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여러 작품을 조금씩 진행한다. 박 화가는 캔버스를 직접 손으로 만져가며 작업하기에 한번 물감을 칠한 뒤 마르기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금방 번지고 얼룩투성이가 되는데, 이를 막기 위해 물감이 마르는 시간 동안 다른 작품을 작업한다. 여러 작품을 한꺼번에 진행하면서도 어느 작품을 어디까지 진척했는지 그는 정확히 기억한다.

작업실로 쓰이는 자택 거실에 앉아있는 박환 화가
박 화가가 현재 작업 중인 작품

박 화가는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다. 성인이 된 뒤 1980년대부터 동양화를 그려 팔았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동양과 서양을 넘나드는 화풍을 구축했다. 사고 전에는 누추한 달동네, 판잣집, 도시의 가난과 궁핍 같은 사회성 짙은 풍경을 많이 그렸다. 40여년의 화가 인생에서 총 네차례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입선했고 두차례의 공모전 수상 경력도 있다. 1998년대부터 여덟번의 단체 전시회, 다섯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2013년 한국국제아트페어에 초청돼 세계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알렸다.

내 그림을 내가 못 보는 고통

한국국제아트페어가 끝나고 3주 뒤 그의 인생을 바꾼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화가로서 앞이 안 보이게 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트럭에 치이는 교통사고는 그를 빛도 전혀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영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됐다고 생각한 가족들은 그의 작업실을 정리하고 갖고 있던 재료도 대부분 버렸다.

그는 사고의 충격으로 한동안 생명을 끊으려고 애를 썼다. 박 화가는 당시의 고통을 회상했다. “희망이 없으니까 살 이유가 없잖아요. 하루라도 일찍 죽는 방법을 고민했죠. 동생 팔을 잡고 매일 걷던 집 앞 도로가 있었는데 하루는 차도에 뛰어들려고 시도했어요. 마음속으로 어머니께 다 인사하고, 하나, 둘, 셋을 속으로 세고 있었죠. ‘이때다’ 싶었을 때 동생이 “초록불이야, 오빠. 가자 이제”라고 팔을 잡아끌어 정작 시행은 못 했어요.” 한번은 그가 11층 아파트의 거실 창문에서 뛰어내리려던 것을 가족들이 발견해 붙잡기도 했다.

가족은 그가 희망의 끈을 놓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시력이 회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3년 가까이 그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저 회복되는 과정이라고만 설명했다. 화가인 그가 이제 평생 눈이 안 보이게 됐다는 말을 감당하게 하기 싫었던 것이다. 병원에 가면 가족들은 ‘눈이 보일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세요’라고 쓴 종이를 의사 앞에 내밀었다. 열심히 치료받으며 3년여를 버틴 그는 2016년에야 자신이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고 이후 처음 여는 개인전 ‘눈을 감고 세상을 보다 박환 특별전’(2017)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시회 담당자와 동생의 대화를 듣게 된 것이다. 그 뒤 몇달간 다시 오열의 시간을 보냈다. 매일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고 가족이 말을 걸면 화를 냈다. 사고 이후 다시 찾아온 두번째 절망감이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형마저 원치 않은 시기에 암으로 세상을 등졌어요. 우리 집 남자들, 나까지 다 이렇게 되는구나 생각했죠.” 박 화가는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어머니와 여동생, 아내와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환, <기다림2>, 2011년, 캔버스에 흙·나무. 박환 제공
박환, <빨간 지붕>, 2018년, 캔버스에 흙·실·청바지·나무. 박환 제공
고통의 시간을 넘어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그는 사고 후 첫 전시회 때 그림 가격을 절반으로 내려야 했다. 사고 전 자신이 그리는 가장 작은 크기의 그림을 500여만원(호당 50만원)에 팔던 그였다. 새롭게 시작하는 신인 화가라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보다 더 큰 아픔은 자신의 작품을 본인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하는 답답함이다. 작품을 완성하고도 이게 어떤 모습인지 그는 볼 수 없다. 박 화가는 “만약 내가 앞을 볼 수 있다면 햇빛과 사람의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린 그림들을 제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생각한 대로 그려놓은 것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일 때가 한두번이 아니에요. 잘 표현을 했는지 지금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막말로 미칠 노릇이죠.”

자신의 그림을 직접 볼 수 없기에 때로는 가족들이 작품 상태를 말해줄 때도 있다. 사고 이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도 가족들이 그 과정을 지켜봐줬다. “(사고 이후) 그림을 다시 그려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전혀 들지 않았어요. 안 보이는데 뭘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다 종일 앉아 있는 게 지루해 심심풀이로 조금 그리기 시작했는데 언제부턴가 식구들이 ‘그림 괜찮다’ ‘멋있다’ 하더라고요. 처음엔 어느 위치에 뭘 그렸는지도 모르겠고 수도 없이 빗나갔죠. 그러다 괜찮다는 말을 들으니 어느 순간 ‘이거 되나 보다’ 해서 그때부터 다시 작업하기 시작했어요.”(박 화가)

“희망은 있는 게 아니라 찾는 것”

시력을 잃기 전과 후의 작품 세계도 조금 달라졌다. 세밀한 묘사가 돋보였던 그의 작품은 시력을 잃은 뒤 화사한 색감이 두드러지고 선의 경계가 모호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화풍으로 변화했다. 도시의 풍경보다 자연 풍경을 그리는 일이 많아졌다. 특별한 계기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게 질문하면 답을 못 한다. 어떤 의도나 계획은 전혀 없고 그저 떠오르는 것을 그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인생은 늘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큰 계획이나 대단한 욕심이 없다. 그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은 소망만 품고 있다. 그가 신체적 어려움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까닭은 높은 예술적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어서라고 한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도전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찾았으면 한다고 했다. 박 화가는 “눈이 보이지 않는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이라며 “나는 그 불가능에 도전하는 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예술적 호평은 바라지도 않아요. 제 그림을 보고 누군가 감동을 받고 희망을 얻는다면 그게 기쁜 일이죠. 희망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찾는 것이니까요.”

춘천/글·사진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재료로 쓰이는 청바지 조각이 담긴 바구니가 그의 작업대에 올려져있다.

스케치 작업이 한창인 캔버스. 여러 개의 핀이 꽂혀 있고 굵기가 다른 무명실이 이리저리 붙어 있다.

박 화가의 작업대 위엔 구획이 나뉜 플라스틱 통에 색깔에 따라 물감이 담겨있다. 물감이 놓인 위치와 손으로 만졌을 때 기름기의 점도에 따라 색을 구분해 사용한다.

박 화가의 작품에 사용되는 나무껍질 재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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