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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15 15:12 수정 : 2017.09.19 14:54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1일 청와대에서 서훈 신임 국정원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강희철의 법조외전⑤
국정원, 2005년 불법도청으로 검찰 수사받고도
2010~12년 댓글공작·블랙리스트로 사찰 되풀이
적폐 수사·정보관 폐지만으로는 근본개혁 안돼
“국내 보안정보 수집 기능 자체를 법에서 없애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1일 청와대에서 서훈 신임 국정원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국가정보원 사건으로 서초동이 시끌하다. 검찰이 국정원의 수사의뢰를 받아 과거 정부의 ‘전비’ 청산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다. 지지난 대선 당시 댓글 공작에 대한 사실상의 재수사가 이미 본격화했고, 14일엔 국정원이 진보 성향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사찰한 ‘블랙리스트’ 사건을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그 와중에 검찰이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을 대놓고 비난하는 성명을 내고, 이에 법원이 “부적절한 의견 표명”이라며 검찰을 공박하는 흔치 않은 장면도 벌어졌다.

각설하고, 이 수사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기자가 아는 법조인들은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추가 기소될 가능성은 높게 보면서도 검찰의 ‘칼끝’이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갈 것인지를 두고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수사는 생물이라서 장담할 수 없지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지시 여부가 드러나지 않는 한 전직 대통령 처벌까지 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그런데, 과거 국정원을 수사한 경험이 있는 법조인 ㄱ이 이런 말을 툭 던졌다. “기시감이 있지 않아요? 이번 수사가 끝나면 국정원의 정치 개입이 근절될 거라고 믿나요? 난 지금처럼 가서는 제2, 제3의 원세훈이 나온다고 봅니다.”

2005년 검찰 수사관이 안기부가 불법 도청을 위해 운용한 ‘미림팀’ 자료를 옮기고 있다. 한겨레
그가 언급한 ‘기시감’이란 12년 전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2005년, 검찰은 임동원·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을 구속했다. 군사정권도 보수 정권도 아닌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낸 두 사람이 불법도청 혐의(통신비밀보호법 위반)로 동시에 구속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검찰이 먼저 ‘인지’를 한 것은 아니고, ‘미림팀’이라는 국정원 도청팀의 실체가 언론에 보도된 뒤 국정원이 마지 못해 자체 조사에 나서고, 검찰 수사가 뒤따라 이뤄졌다. 당시 검찰이 밝힌 이들의 혐의 사실은 지금의 댓글공작, 블랙리스트 작성 못지 않게 위중한 것이었다. 검찰은 두 사람이 원장 재직 당시 감청전담 부서인 8국 산하 감청팀을 3교대로 24시간 운용하면서 국내 주요 인사들의 휴대전화를 불법감청하는 데 관여했다고 밝혔다. “두 전직 원장이 국정원 8국(과학보안국)의 불법감청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불법감청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적시된 구절이다. “국정원이 도청을 근절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정면으로 어겼고, 불법감청을 이용해 사실상 국내 정치사찰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찰.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도 실은 대상자의 뒤를 캐는 사찰의 결과물이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을 파악하고 다닌 국정원 직원 송아무개씨도 결국은 ‘상부’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불법적인 사찰 활동에 투입되었을 것이다.(법원은 송씨 판결문에서 매우 이례적으로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방해 음모에 따라 국정원 상부 내지 배후 세력의 지시에 따라 저질러졌을 것으로 능히 짐작된다”고 밝혔다.) 2005년 사건에선 도청을 통한 사찰, 즉 사찰의 한 방편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불과 수년 전 이처럼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도 이명박 정부 들어 또다시 국정원이 사찰과 정치 개입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이 궁금증은 당시 임동원·신건 두 원장에 앞서 구속된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의 법정 진술을 보면 풀린다.

김 전 차장은 2005년 11월2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재판 두번째 공판에서 국정원 내부에서 사찰이 어떻게 최상층부까지 보고되고 묵인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혔다.

“(국정원의 불법감청은) 1970년대 초부터 있었다. (자신이 국정원에 들어간) 입사 초기부터 (불법감청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감청 정보를 담은 첩보보고서를 임동원·신건 전 원장에게 직접 들고 가 보고하기도 했다. 통신첩보 보고서를 담은 봉투가 일년 열 두 달 매일 원장 책상에 올라온다.”

“국정원에 30여년간 있으면서 ‘도청하지 말라’, ‘월권하지 말라’, ‘정치사찰 하지 말라’, ‘신분 노출하지 말라’는 이 네 가지 얘기는 항구여일 들었던 것이다. 어느 원장도 이 얘기를 안 한 사람이 없지만, 그 다음날도 어김없이 감청보고서는 위로 올라갔다. 원장이 감청 근절을 지시했지만, 그건 일종의 관행이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보고서가 원장에게 필요 없었다면 단 한 번이라도 원장이 보고서를 찢든지, ‘더 이상 올리지 말라’는 지시를 했겠지만, 그런 지시는 없었다. 국회 국정감사 때마다 국정원 불법감청이 현안이었는데, 한 번도 국정원 내부 수사를 맡은 감찰실에 원장이 감찰을 지시한 바 없다.”

그 무렵 기자가 알고 지내던 한 국정원 ‘아이오’(IO·Inteligence Officer·정보관)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감청은 (활동의)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아이오)가 국회, 정당, 정부 부처, 기업, 언론사 등을 출입하면서 정보 수집하고, 그걸 상부에 보고한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 아니냐.” 실제로 국정원 아이오들은 매일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에이(A)4 용지 1매 내외로 요약해 상부에 보고하는 ‘숙제’를 해야 했고, 이를 위해 지연과 학연, 인맥 등 갖은 연줄을 동원해 사람들을 만났다. 이건 비밀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진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일 것이다.

검찰의 국정원 수사는 여러 차례 이뤄졌다. 2005년 8월19일 저녁 서울중앙지검 검사와 수사관, 컴퓨터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40여명의 검찰 압수수색팀이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을 압수수색한 뒤, 승용차와 소형 버스에 나눠 타고 정문을 나서고 있다. 김정효 기자

문제의 ‘정보관(IO)’ 제도는 문재인 정부 들어 폐지가 공식 선언됐다. 서훈 신임 국정원장은 지난 6월1일 청와대에서 열린 임명장 수여식에서 “오늘 취임하면 첫번째 조치로 국내 정보관의 기관 출입을 전면 폐지하겠다. (폐지 대상은) 통상 아이오라고 부르는 부처, 기관, 단체, 언론 이런 곳에 출입하는 정보관들”이라고 말해 문 대통령의 박수를 받았다.

서 원장은 내곡동 청사에서 열린 취임사에서도 “국정원은 문재인 정부 임기 내에 완전히 새로워지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기관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다짐한 뒤, 내부를 향해 “우리는 지금 어려운 길에 들어서려 한다. 팔이 잘려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상처 없이 다시 설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고 비장한 어조로 개혁을 주문했다.

이제 이만하면 된 것일까?

국정원 수사를 해봤거나 국정원을 잘 아는 법조인들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취임사 나도 봤다. 비장하더라. 그런데 역대 어느 국정원장도 공개적으로 정치 개입을 하라거나, 하고 있다고 인정한 적이 없다. 아이오 폐지가 참신한 것 같지만, 박근혜 정부에서 이병기 원장도 한다고 하지 않았나?”(검찰 출신 변호사 ㄴ)

기사를 검색해 보면 국정원은 박근혜 정부 때인 지난 2014년 8월 아이오 폐지와 정치활동 금지, 해당 조직 축소 등을 추진하겠다고 공표했다. 당시 국정원은 정치권과 언론사의 정보수집 활동을 금지하는 등 국내 정치개입 소지를 최소화하기로 했고, 구체적으로는 “정보관(IO)의 국회, 정당, 언론사 상시 출입을 금지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또 국정원내 관련 조직은 축소조정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 새로 취임한 원장이 마치 전혀 새로운 조치인 것처럼 아이오 폐지를 언급한 것이다.

“이제 와서 서훈 원장이 국정원의 3년 전 대국민 약속을 되풀이 하는 것은 그동안 국정원이 아이오 폐지를 하지 않았다는 방증인 셈이다. 이제는 ‘아이오 출입 안 시키겠다’는 정도 약속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법조인 ㄱ)

근원적인 해결 방안은 무엇일까. 검찰총장을 지낸 인사의 말이다.

“국정원법에 ‘국내 보안정보 수집’ 기능이 남아 있는 한 국정원은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언제든지 다시 사찰에 나설 수 있다.”

그의 말처럼, 국정원 당국자들은 국내 정보수집 활동의 근거를 묻는 질문에 항상 국정원법 제3조를 보라고 답하곤 했다. 국정원의 ‘직무’를 규정한 제3조에는 “국외 정보 및 국내 보안정보[대공, 대정부전복, 방첩, 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의 수집·작성 및 배포”라고 돼 있다.

대다수 법조인들은 이 조항을 근거로 아이오를 운영한다는 국정원의 그간 설명에 “그것은 국정원의 편의적 해석”이라고 말한다. “국회와 정당, 언론사를 기웃거리며 정보를 수집하는 게 국내 보안정보 수집이라고 주장하면 소가 웃을 일이다. 국회와 정당, 언론사가 무슨 간첩들의 소굴이라고 된다는 거냐.”(검찰 간부 ㄷ)

검찰 수사는 일회성이다. 털고 지나가는 것이다. 검사는 국정원 또는 거기 소속된 간부나 직원의 행위가 법을 어겼는지를 따질 뿐이다. 수사가 제도 개혁의 계기는 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을 추진하고 성사시키는 것은 결국 대통령과 정치권의 몫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국정원의 국내 정보수집 업무 폐지와 ‘해외안보정보원’으로의 전면적인 개편을 공약했다. 대통령이 된 뒤 그는 서 원장에게 임명장을 주는 자리(6월1일)에서 “국정원의 궁극적 개혁은 좀 더 논의해야 하지만 그때까지 우선적으로라도 국내 정치 정보만큼은 철저하게 금지하겠다는 약속을 꼭 해달라”고 했다.

그 뒤로 서 원장은 원내에 적폐청산 티에프(TF)를 설치하고 댓글 공작과 블랙리스트 작성 건을 검찰에 수사의뢰하는 등 취임사 일부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러나 정치개입과 사찰을 어떻게 근절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할 언급을 내놓지 않고 있다. ‘상처’는 내고 있지만, 정작 어느 ‘팔’을 어떻게 얼마나 수술할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다시, 전직 검찰총장. “문제의 시발점이자 근원은 국정원의 대공 수사권이다. 과거 정권들에서 이뤄진 사찰도 대부분 대공수사를 위한 첩보 수집이라는 미명 하에 이뤄졌다. 백보 양보해서 과거에는 그런 기능이 필요했다고 치자.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대공수사는 과감하게 경찰에 넘기고, 국정원은 진짜 정보기관으로 가야 한다. 그러자면 저 국내 보안정보 수집 기능부터 완전히 없애야 한다. 그게 국정원 개혁 의지의 바로미터다.”

국정원 내부를 잘 아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곳도 바로 이 대목이다. 아이오 제도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다. 이 제도가 없어지는 순간, 그 많은 아이오들은 ‘잉여인력’이 된다. “얼마라고 말은 할 수 없지만, 정말 많은 숫자가 있다. (국내 정보수집) 기능과 부서가 없어지면 그 인력을 딴 곳으로 돌려야 하는데, 그때는 또 ‘전문성’이 문제가 된다. 재교육도 한계가 있다. 내보내는 건 더 어렵다. 개혁이 말처럼 쉽지 않은 건 결국 ‘밥그릇’ 문제이기 때문이다.”(한 국정원 직원)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은 어디까지 실천에 옮겨질까? 검찰수사 이후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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