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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02 18:13 수정 : 2005.03.02 18:13

시방, 교회는 사순 절기를 걸어가고 있다.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며 부활절 수선화가 피는 날까지 마음을 모아 정진하는 절기다. 예수처럼 죄 없이 고난받는 약자들을 각별히 챙기고 돌보라는 절기이겠다. 복음서의 고갯마루라 할 만한 예수 수난사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든 문외한이든 간에 듣는 이의 왼쪽 가슴께를 저리게 만든다. 작년 이맘때, 예배당 찬마루에 방석을 깔고 앉아 빠졸리니 감독의 <마태복음>이란 영화를 보았다. “우리말 좀 갈쳐서 영화를 찍재만은 그랬소잉” 자막을 읽지 못하는 할매들은 복장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천당 영화공작소에 근무하고 있다는 빠졸리니에게 엽서라도 한 장 날려야겠다. 앞으로는 이태리말로 영화 찍지 마시라고. 게다가 영화는 오죽이나 길던가. 하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마태복음 26, 42) 예수가 게쎄마니 언덕에서 기도를 한판 날리고 십자가를 짊어지자 촌로들은 다투어 눈물을 훔치셨다. 죄 없이 당하는 고난, 동병상련의 인연이 틀림없을 농부들은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 앞에서 같이 서러울 밖에.

아버지 뜻은 무엇일까? 여쭈어 보면 누구라도 대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잘 여쭙고(기도하고) 살아야 한다. 뜻대로 산다 함은, 님이 원하시는 대로 삶을 온전히 내맡기는 거다. 이 시대의 슬픔은 가르침이 없는 게 아니라 배움의 자세가 없다는데 있다.

예수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사셨다. ‘나’는 아니다(非) 하여 ‘나비’인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예수야말로 나비를 빼닮았다. 비겁하게 살기 보다 당당하게 죽는 길을 걸어간 예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한 예수는 결국 영원한 생명의 월계관을 썼다. 천년만년 갈 것 같던 대제국 로마와 앞잡이 헤롯 정권, 어벌쩡하던 기성품 종교는 예수운동을 짓밟은 그날로 쇄망의 나락에 떨어졌다.

한때 풍미하고 앙앙대던 겨울도 따순 봄볕 앞에 버틸 도리가 없다. 차디찬 자기 오만, 고집, 주장을 좀 죽이고 살아가자. 하늘의 뜻을 여쭙고 살아가자. 천지사방 한 말씀 들려오는, 새들마다 지저귀는 오늘은 봄날이다.

임의진/ 전 남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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