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04 16:19
수정 : 2005.03.04 16:19
아젠다의 세 유형-실천매뉴얼·미래담론·요다형
지금 기획자들은 트렌드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무엇을 펴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하던 ‘변화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협박도, ‘돈’과 ‘부자’에 대한 은근한 유혹도 이제는 소용없다. 그런 ‘거대담론’을 적당히 포장만 바꿔 내놓아도 팔리던 시대는 갔다.
새해에는 새로운 흐름이 느껴진다. 대중은 더 이상 거대담론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상의 실천을 통해 작더라도 확실한 결과를 얻기를 바란다. 이미 이런 변화는 감지됐었다. 작년 연초 출판시장을 주도했던 <인생을 두배로 사는 아침형 인간>(사이쇼 히로시)에서다. ‘아침잠만 줄이면 인생이 즐겁다’는 평범한 충고를 담은 이 책은 6개월 만에 90만부나 팔렸다.
이런 변화에 대해 나는 올해 초에 ‘이젠 아젠다’라고 정리했다. 이는 실천매뉴얼이라고 바꿔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21세기 초두에 이미 변화의 담론을 깨우치고 자신을 지탱해줄 ‘외투’가 모두 태풍에 날라 갔지만 그렇다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없기에, 그래도 살아가야 할 어떤 실마리라도 찾아야 하기에, 아직도 책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두 달이 지난 지금, 올해에 나타난 아젠다는 대략 다음 세 유형으로 나뉘어 나타난다.
첫째 유형은 소박한 실천매뉴얼이다. 지금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는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탄줘잉)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청소년 이하의 독자들이 많이 보는 것으로 집계됐다. 꼭 해야 할 일이란 사랑에 송두리째 걸어보기, 소중한 친구 만들기, 부모님 발 닦아드리기, 추억이 담긴 물건 간직하기 등 너무나 평범하면서 누구나 즉각 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두 번째 유형은 미래담론이다. <2010 대한민국 트렌드>(LG경제연구원), <10년 후 한국> <10년 후 세계>(이상 공병호) 등 직장인들이 주로 찾는 책이다. 이 책들은 ‘10년 후’에 실제로 이루어질 변화를 지금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해서 추출해낸다. 갑자기 찾아온 ‘위기’를 허둥거리며 쫓아온 사람들이 자기반성에서 찾는 책들이다.
세 번째 유형은 ‘요다형’ 책이다. 요다는 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외계인으로, 초능력과 예지력으로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존재를 상징한다. <강의>(신영복), <죽비소리>(정민) <경영의 교양을 읽는다>(박기찬 외),
(톰 버틀러 보던) 등의 책은 ‘요다’ 같은 사람이 고전(또는 신고전)을 압축 요약한 것이다. 선험자의 ‘깊은 성찰’이 담겨 있는 요약본은 날로 분주해지는 대중에게 발 빠른 ‘지혜’를 안겨준다. 따라서 이 유형의 책은 책의 가치를 아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먼저 찾아 읽는다.
지난 시절에 대중은 위기 때마다 난세를 돌파할 ‘영웅’을 갈구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광풍과 정치인들의 한심한 작태를 동시에 겪으면서 대중은 이제 믿을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대의 역사가 개인이라는 ‘상품’의 발견의 역사이듯이 이제 그들은 자신의 ‘힘’과 ‘무기력’을 동시에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 개인이 지난해에는 <다 빈치 코드>(댄 브라운) 같은 ‘팩션’(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결합한 소설)을 읽으며 자기 상상력을 어느 정도 회복했고, 올해는 그 상상력으로 자신이 발 디디고 누울 자리를 확실하게 찾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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