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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18 18:04 수정 : 2005.03.18 18:04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

1951년 11월 7일 자유당의 전신이었던 통일노동당 선전부의 양우정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 나라의 정치노선은 공산당의 정치노선을 제외하고는 이 박사(이승만) 정치노선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뿐이다.” 그는 덧붙였다. 이 박사 정치노선을 반대하는 부류는 정권 야욕 때문에 민족을 분열시키고 민중을 선동하므로 공산당과 같다고. 이것은 한 정치가의 촌극이라기보다는 당대 정치의식의 전형이었다.

파행과 굴절로 일그러졌던 해방공간과 1950년대는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문제적 시공간이다. 우리 시대로 이월된 미완의 과제들이 거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승만과 그의 시대를 통해 극우반공체제의 정치공학과 기형적인 정치문화의 기원을 탐구한다. 지은이는 먼저 이승만 집권 초기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해부한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등극한 후 ‘일민주의’를 제창했다. 반공주의라는 소극적 이데올로기만으로는 김구·김규식 등의 민족주의자와 남북의 공산주의자에 대항하는 데 옹색했기 때문이었다.

일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이자 민족의 지도원리로 선전되었지만, 정치 이데올로기로 명명하기 딱할 만큼 함량 미달이었다. 일민주의의 4대 정강은 신분·빈부·남녀·지역 차별 타파로, 상식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일민주의는 파시즘적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승만은 “하나를 만드는 데 장애가 있으면 이를 제거하여야 한다”며 섬뜩한 전체주의 논리를 폈다. 일민주의의 전파자인 이범석은 ‘피의 순수성’과 우생학적 종족론까지 들먹였다.

권력욕 도덕·윤리로 포장 ‘천왕‘처럼 국민위에 군림 일본 군국주의와 맥 닿아
정먹 없애고 6·25 끝나자 극우 반공주의로 대변신 ‘친일정권’ 본색 호도

일민주의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것이 일본 군국주의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일본의 천황처럼 제도와 법을 넘어선 영도자로 추앙받았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은폐하고 도덕화한 것처럼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욕을 도덕과 윤리로 포장했다. 또한 일본 정치가들이 천황과 국민 사이에 가족관계를 만들어내려 한 것처럼 일민주의자들은 국가·민족과 가정을 동일시했다.

정적들이 제거되고 한국 전쟁이 끝나자 일민주의는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극우반공주의만이 유일 이데올로기로 활개를 쳤다.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는 친일파의 생존논리이자 정적을 무력화시키는 도구였다. 한 거물 정치인이 북진 통일을 위해 원자탄 사용까지 불사하겠다고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은 반공의 마력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친일정권의 본색을 호도하기 위해 반일운동에 나선 것도 반공논리였다. 정당정치조차 극우반공의 논리에서 한 발짝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이승만과 유교이데올로기의 관계다. 이승만은 가정적, 교육적, 종교적, 정치적 배경으로 볼 때 서양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의식이나 정치행태는 봉건적 습속에 젖어 있었다. 그는 군주나 왕족처럼 행세하고 국민 위에 군림했다. 미군정 요인이었던 버치는 “이승만씨는 결코 파시스트가 아닙니다. 그는 파시스트보다 2세기 앞입니다. 순수한 부르봉파예요”라고 말했는데, 정곡을 찌른 셈이었다. 한마디로 이승만은 절대적 권력의지의 화신이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비애와 환멸감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친일파 청산이나 평화통일 같은 시대적 대의가 독재와 반공의 논리에 능멸당하는 게 슬프고,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기보다는 극한적 대립으로만 치달았던 미성숙한 민주주의가 못나 보여서다. 하지만 진실에 등돌리는 것은 과거의 악몽으로 회귀하는 길이다. 최근 일부 언론과 학계를 주축으로 한 이승만 복권 운동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허구적인지 간파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박천홍/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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