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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25 17:38 수정 : 2005.03.25 17:38

지난 22일 저녁 서울 대학로의 한 식당에 50여 명의 문인이 모였다. 도서출판 작가에서 낸 기획 단행본 <2005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와 <…오늘의 소설>의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두 권의 책은 문인들을 상대로 2004년 한 해 동안 발표되거나 출간된 시와 소설 중 가장 좋은 작품을 고르도록 설문을 돌린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설문 응답에 따라 <…오늘의 시>에는 79편의 시와 함께 19권의 시집에 대한 서평이 실렸으며, <…오늘의 소설>에는 8편의 단편에 더해 10권의 장편 또는 소설집에 대한 서평이 담겼다.

출판기념회에서는 시와 소설 양쪽에서 최고의 표를 얻은 문태준씨와 박민규씨에게 출판사 쪽에서 마련한 축하패가 전달되었다. 축하패는 이것이 ‘가장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공정하게 주어지는 상’임을 강조했다. 비록 상금은 없지만 동료 문인들의 ‘직접투표’에 의한 결정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으리라.

출판사 쪽에서 밝힌 바로는 <…오늘의 시>의 경우 120명의 시인·평론가가 설문에 참여했으며, 소설 쪽에서는 56명의 소설가와 평론가가 설문에 응했다. 문태준씨의 시 <가재미>는 응답자 중 9명의 추천을 받았다. 문씨는 시집 <맨발>로 모두 16명의 추천을 받아 ‘가장 좋은 시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문씨는 지난해의 같은 설문에서도 시 <맨발>이 ‘가장 좋은 시’로 뽑힌 바 있다. 소설에서는 박민규씨의 단편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가 모두 15명의 추천을 받았으며, 공지영씨의 소설집 <별들의 들판>은 13표를 얻어 가장 좋은 소설집·장편에 올랐다.

‘좋은 시인’ 부문에서 5위에 오른 중진 시인 천양희씨가 축사를 하는 등 출판기념회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천씨는 “시든 소설이든 잘 쓰는 사람의 자리는 주인이 없다”면서 “순위에 오르지 못했다고 해서 질시와 낙담은 금물이며 서로 자극 받고 격려하는 자리였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태준씨의 ‘수상작’이 <가재미>인 것을 감안한 식당 주인이 가자미찜을 상에 올려 놓는 ‘센스’를 발휘해 더욱 흥을 돋웠다(기린 요리는 나오지 않았다).

출판사 쪽은 “작품의 양은 늘고 있지만 갈수록 좋은 작품의 비중은 줄어드는 가운데, 독자로 하여금 좋은 작품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을 제공한다는 데에 이 기획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출판사 쪽의 선의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기획이 초래할 부정적인 파장만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시인별 득표 수를 포함한 시 부문 결과가 먼저 발표된 뒤 문단 한켠에서는 자조적인 농담이 나돌았다. ‘누구는 몇 등 시인이고, 누구는 몇 등이래’ 하는 식의 농담이었다. 문태준씨의 시와 박민규씨의 소설이 ‘좋은’ 작품이라는 데에는 별 이견들이 없겠지만, 그것이 ‘가장’ 좋은 작품이라는 데에는 얼마든지 이견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문인들이 설문에 응했다고는 하나 50명 내지 100여 명의 문인이 모든 문인을 대표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1등주의’와 서열화란 얼마나 비문학적인 발상인가. 시 부문 결과가 발표된 뒤 신문들은 일제히 ‘최고 시인 문태준’ 식의 기사를 대문짝만 하게 실었다. 다른 시인들이 느꼈을 자괴감과 씁쓸함, 문 시인 자신이 느꼈을 송구스러움을 헤아릴 만한 섬세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동료가 주는 상’의 아름다움을 1등주의의 병폐가 갉아먹고 있는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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