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의식의 문학과 감각의 문학 |
혹시 이명준이란 이름의 청년 잠수부를 아시오? 1953년 늦여름 그가 중립국 인도 선박 타고르호에 실려 크레파스보다 짙은 쪽빛 동중국해를 항해하고 있소. 무연한 그의 눈에 비친 것은 흰 갈매기 두 마리. 마스트 위로 선회하고 있지 않겠는가. 우리를 팽개쳐두고 도망치느냐는 목소리로 들리지 않겠는가. 순간 청년의 눈과 귀는 절벽으로 변했소. 쪽빛 바다에 뛰어들 수밖에요. 수압을 견뎌야 하는 긴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됐소. 무기는 오직 의식뿐. 그 의식의 다른 명칭을 4·19라 하오. 작가 최인훈 아닌 4·19가 <광장>(1960)을 썼다는 것은 그것이 잠수부의 기원이자 그 원년(元年)임을 새삼 말해줌이오. <회색인>(1977)을 지나고 <화두>(1994)에 이르기까지 이 잠수부의 의식은 한반도의 이데올로기적 수압계의 민감하기 짝이 없는 눈금이었소. 그렇다고 오늘에도 그 눈금은 여전한가. 그럴 이치가 없소. 이데올로기적 수압이란 인위적인 것. 한갓 역사적 시간 속의 일이었으니까. <바다의 편지>(2003)가 씌어질 수밖에 없는 곡절이 여기에서 왔소. 드디어 수압에 패배하는 의식의 마지막 몸부림이 선연하게, 또 안타깝게 그려질 수밖에. 어머니에게 보내는 아들 잠수부의 처절한 유언장이 거기 있소.
그렇다면 그 ‘의식’은 어디로 갔을까.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의 백골로 환원되지 않았을까. 이데올로기의 본래 모습이 백골이었음을 보여준 사례로 이것보다 놀라운 문학적 방도가 따로 있을까. <바다의 편지>를 두고 의식의 문학이 닿은 꼭지점이라 함은 이 때문이오.
의식의 문학이란 새삼 무엇이뇨. 역사적 시간 속의 문학이기에 그 끝간 데가 언젠가 있기 마련. 의식이란 후설의 말대로 반드시 ‘무엇에 대한’ 의식이기에 그럴 수밖에요. 그렇다면 감각의 문학은 어떠할까. 감각이란 새삼 무엇이뇨. 자연적 시간 속의 문학이기에 그 끝간 데가 있을 수 없소. 잠시 볼까요.
여기는 삼복 더위의 시골 저수지. 고추를 내놓은 아이놈들이 뛰어들어 헤엄을 치고 있소. 매우 당연히도 머리를 뱀처럼 쳐들고 헤엄치지 않겠는가. 영락없는 뱀헤엄치기. 뱀이 저수지나 방죽물을 헤엄쳐 건너가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일까. 앞이나 주변의 위험을 살피면서 헤엄쳐야 하는 만큼 머리를 물 위로 내놓고 상체와 함께 힘차게 움직일 수밖에요. 속도 문제라면 잠수해서 헤엄치기를 따를 수 없지요.
앞이나 주변의 위험을 살피면서 헤엄쳐야 함이 뱀헤엄치기라면 그 무기는 과연 무엇일까. 감각이지요. 그것은 혼자 밤의 산길 가기에 비유됩니다. 한치 앞도 뵈지 않는 밤의 산길 가기에서 기댈 수 있는 곳은 자기의 귀와 눈 그리고 촉각일 뿐. 불안과 두려움 속에 혼자서 밤의 산길 가기만큼 아득한 것이 따로 있을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는 노릇. 이처럼 난감한 일이 또 있을까. 더욱 난감한 것이 또 있소. 자연적 시간 속의 일이기에 끝이 없다는 것.
이 자연적 시간과의 싸움이 문학이라면 그 무기는 감각밖에 없소. 감각이란 새삼 무엇이뇨. ‘의식’과 비교하면 한층 선명해지오. ‘의식’ 이전의 상태, 원초적인 것이지요. 이 원초적 감각의 특징은 또 무엇인가. 그 존재방식이 공감각(共感覺)이라 파악한 것은 옛 희랍인 아리스토텔레스이지요. 시각은 촉각과 더불어 또 청각은 시각과 더불어 작동함은 뱀헤엄치기에서 잘 볼 수 있소. 여기에는 해방이나 해탈이란 있을 수 없소. 원초적 감각이란 자연적 시간 속의 일. 생명감각의 영역인 까닭이오. 그렇다면 이는 한갓된 본능적 영토일까요. 이 한 가지 물음 앞에 <서편제>(1976), <눈길>(1977), <꽃 지고 강물 흘러>(2003)의 작가 이청준이 서 있소. 생명을 한층 그답게 하는 질서감각이 따로 있다는 것. 이른바 예(藝)의 감각이 그것. 동물적 범주에서 인간의 범주를 갈라놓는 감각, 이를 다르게는 윤리적 감각이라 하오.
잠수부의 의식으로 이 나라 문학판을 점검함이란 얼마나 힘겨울까요. 그렇지만 거기에는 해탈이 있소. 뱀헤엄치기의 감각으로 이 나라 문학판을 점검함이란 또 얼마나 막막할까요. 딱하게도 거기에는 해탈이 없소. 멈출 수 없는 산길 홀로 가기이기에.
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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