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15 15:26
수정 : 2005.04.15 15:26
‘20세기 브랜드에 관한 명상’윤준호씨
삼표연탄, 락희치약, 삼학소주, 유엔성냥, 범표 운동화…. 사라진 이름들이여!
우리네 삶의 일상언어에서 이제는 자취를 감춘 상표 이름들은 입 안에서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거기에 묻어 있던 무수한 추억의 조각들을 지금 이 자리의 시간과 공간에 다시 불러낸다.
사라지거나 주변으로 밀려난 상표들이 빚어내는 삶과 꿈에 관한 에세이 <20세기 브랜드에 관한 명상>(랜덤하우스중앙)을 낸 윤준호 서울예술대 교수(광고창작과)는 “추억의 상표는 개인사와 가족사는 물론이고 한 시대 대중적 삶의 풍경이 담긴 ‘한 사회의 앨범’ 같다”고 말한다. 칠성사이다가 어릴 적 소풍날의 풍경과 그날 싸운 친구의 얼굴을 생각나게 하듯이, 삼표연탄이 “연탄 한 장으로 대여섯 식구의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만들어주던 시절”로 잠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20세기 상표에 관한 명상’은 지난 100년의 작은 생활문화사인 셈이다.
지은이가 불러낸 상표는 이밖에도, 동춘서커스단, 오케레코드, 선데이서울부터 풍년라면, 화랑담배, 닭표 간장, 그리고 금성라디오, 눈표 냉장고, 공병우타자기까지 아우른다. 원기소, 이명래고약, 산토닌, 낙타표 연필, 반달표 스타킹, 월남치마 등은 이름만 들어도 ‘맞아, 그 때 그 시절…’의 추억을 자아낼 만하다.
윤 교수는 “옛 상표 이름들은 ‘한 세대의 알리바이’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왔다껌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바로 세대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반대로 왔다껌을 아는 사람들이 느끼는 공감대는 바로 확인되고요. 상표는 그 세대의 알리바이가 되는 셈이죠.”
지은이는 상표의 광고문구를 만드는 카피라이터로 살아 왔다. 1983~93년 광고회사에 다녔고, 지금은 대학의 광고창작과 교수로 지낸다. 여전히 광고 현장에서 독립 카피라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상표에 대한 애착과 명상은 이런 오랜 직업의 이력이 만들어낸 관찰과 상상력 덕분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시인이기도 하다. ‘윤제림’이라는 필명으로 87년에 문단에 등단했으며 그동안 <삼천리호 자전거> <사랑을 놓치다> 등 시집 4권을 냈다. ‘카피라이터’와 ‘시인’이라는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릴 듯한 두 직업의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이번 책은 사실 두 명이 함께 쓴 공저”라며 “시인 윤제림과 카피라이터 윤호준의 생각이 버무려졌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20세기 상표에 관한 명상에는,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안도현 ‘연탄 한 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신경림 ‘농무’) 같은 시와 소설·산문의 문학이 한 데 어울렸다.
그의 책에서 옛 상표들은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를 넘어서서 우리 시대의 문화가치가 된다. 글·사진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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