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15 15:36
수정 : 2005.04.15 15:36
이상한 나라의 사각형
경문사는 수학 전문 출판사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것도 대학교재 출판사의 이미지다. 이런 이미지를 좀 벗어날 수 없을까 하는 중에 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수학 오디세이’가 기획됐다. 그래서 좀더 친근한 표지, 공식이 등장하지 않는 수학 책,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수학 책 시리즈가 출간되고 있다. 그러던 중 무척 색다른 원고를 발견했다. 바로 <플랫랜드>(Flatland)로, ‘차원’에 대한 고전 텍스트로 유명한 책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한 교육자가 다양한 차원에 관한 내용을 소설 형식으로 쓴 얄팍한 책이었다. 아직 차원의 개념이 보편적이지 않던 19세기 말에 쓴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상상력에다 풍부한 설명, 그리고 사뭇 도전적이기까지 한 내용이었다. 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느낌이 이런 것일까?
소설의 주인공은 ‘사각형’, 그것도 손자까지 있는 초로의 나이다. 소설의 주무대는 이차원 세계인 ‘플랫랜드’. 주요 내용은 2차원 세계와 사각형이 여행한 0, 1, 3차원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사각형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는 2차원 세상 뿐 아니라 3차원의 세상, 아니 그 이상의 세계도 있다는 것을 알리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설득하지 못한 채 ‘내란죄’로 무기징역형을 당한다. 그렇지만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오히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길 바라며 한 자 한 자 회고록을 써내려간다.
그러나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것일까
그 당시로선 최신의 이론이었을 차원에 관해 쉽게 알려줄 목적에서 쓴 소설이었을 것이나 내겐 순간적으로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떠올리게 했다. 한편의 공상과학소설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한 인간의 일기를 읽는 느낌이었다.
“나는 결국 한 명의 추종자도 만들지 못하고 말았다. 확실한 것은 천년에 한 번 주어지는 기회를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이 놓치고 만 것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하늘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지만 이 불쌍한 나, 플랫랜드의 가여운 프로메테우스는 내 조국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채 감옥에 갇혀 있다. 그래도 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다만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다. 다양한 차원의 세계와 그곳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줄 방법과 제한된 세계에 자신을 묶어두고 새로운 세상을 거부하는 자들을 자극할 묘안을 찾고 있다.”
플랫랜드의 실패한 프로메테우스인 사각형의 운명처럼 이 책 역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독자들을 끌어들이지도 못했다. 아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국은 수학 책인 것을 개인적 호감 때문에 너무 힘을 주다 보니까 정작 필요한 사람들한테조차 다가가지 못한 것은 아닌지 하는 후회도 든다. ‘플랫랜드’라는 제목이 생소할까 싶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이미지를 빌려 <이상한 나라의 사각형>이라 한 것이 오히려 너무 식상했던 것은 아닌지, 빅토리아 시대의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 매끄럽지 못한 구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받은 감동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다. 수학 전공자들의 교재가 아닌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이 되길 바랐지만 결과적으론 이뤄지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사각형이 희망을 꺾지 않듯 나 역시 언젠가는 책의 진정한 가치가 발휘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경문사 편집실장 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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