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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15 17:20 수정 : 2005.04.15 17:20

한 장의 잎사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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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어법은 늘 난해하고 낯설다. 그런데도 그의 말에 귀기울이려는 이들이 많다. 때로는 생물학의 정치경제학을, 때로는 페미니즘적 생물학을 드러내는 그의 독창적 어법은 새로운 사고의 ‘충격’을 던져주며 페미니즘과 과학기술학, 그리고 문화비평 등 여러 분야에 적잖은 울림을 일으키고 있다.

생물학자 출신의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과학기술학자, 문화비평가인 다나 해러웨이(61·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의 삶과 학문세계를 들여다보는, 해러웨이와 그의 제자 구디브의 대담집 <한 장의 잎사귀처럼>은 우리 세계와 과학을 바라보는 그만의 독특한 분석 틀을 드러낸다.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그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이뤄진 대담은 학자와 사회운동가로 살아온 그의 삶이 ‘한 장의 잎사귀처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의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해러웨이는 1980년대부터 문제작인 <사이보그들을 위한 선언문> <포스트모던 몸의 생물정치학> <영장류의 시각>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남자ⓒ_앙코마우스™를 만나다> 등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주목받아왔다.

해러웨이 식 ‘은유의 상자’를 통과하면 현대 과학기술, 특히 생물학도 거대한 은유가 되어, 과학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인문사회의 진진한 담론으로 재구성된다.

예컨대 우리 몸에 침입한 이질적 것에 대해 항체를 만드는 면역체제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자기와 타자의 인식 장치’가 된다. 따라서 후천성 면역결핍증(에이즈)은 ‘타자의 오인’으로 풀이된다. 그는 흔히 침입자의 공격과 방어로 묘사되는 생물학의 면역체제 이론에 대해 “전쟁터로 묘사하는 냉전의 수사학이 아닌” 타자와 자기의 담론으로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과학의 범주 뛰어넘어 인문사회 담론으로 재구성
사이보그 이야기에선 여성 노동문제 끌어내
이분법적 사고 거부 치열한 경계 허물기


더욱 더 낯섬을 계속된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동물의 경계에 선 영장류 동물에 대한 논의에서 그는 식민주의 담론과 페미니즘 이론, 인종차별주의를 끄집어내고, 사람과 기계의 경계에 선 사이보그의 얘기에선 사회주의 페미니즘, 여성의 노동문제에 닿는다. 물리학의 ‘빛의 회절’ 개념은 물체를 그대로 비치는 ‘반사’의 방법론과 다르게, 꺾인 빛이 고유하게 거쳐가는 궤적을 추적하는 역사 이해의 방법론이 된다.

해러웨이의 은유는 영장류, 사이보그, 세포, 유전자의 생물학적 경계에 서서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하는 치열한 경계 허물기이자 거침없는 넘나듦으로 비쳐진다. 거기에서 사실과 허구, 과학과 설화의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그는 자연과 문화조차 나눌 수 없다는 의미에서 ‘자연문화’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안한다.

그런데 어떻게 생물학을 인문사회의 담론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인문사회 담론을 생물학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해러웨이는 생물학(과학)과 세계의 은유는 겹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는 생물학의 세계에 친밀하게 살고 있다”는 익숙한 명제에서 출발해 “(그런데) 생물학은 담론이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다”라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는다. 그는 과학기술을 도구적인 것으로 보는 ‘반 과학’의 전통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그리하여 해러웨이의 학문적 전략은 ‘단 하나의 시각’에 대한 저항이다. “정치적 투쟁은 동시에 이 두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왜냐 하면 각 관점은 상대 관점에서 상상할 수 없는 지배와 가능성을 모두 드러내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시각은 이중의 시각이나 머리가 여럿 달린 괴물보다 더 나쁜 환상을 만든다.”

사회운동가의 면모를 지닌 해러웨이가 어린 시절에 수녀를 꿈꾸었으며, 한때 강한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고, 아버지가 열렬한 스포츠 기자였다는 등의 개인사는, 그의 글에서 언제나 ‘사이보그’처럼 차갑고 복잡하게 여겨졌던 그의 모습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어 흥미롭다. 해러웨이의 전작 <유인원, 사이보그…>(동문선 펴냄)를 번역했던 민경숙 교수(용인대)가 우리말로 옮겼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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