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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철학·예술을 가로지르며
교양서 새 지평 연 반룬 전집
우화적 풍자와 은근한 낙관
동시대 함께 한 츠바이크와 대비
헨드리크 빌렘 반룬(1882~1944)의 세계는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의 세계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한 살 터울로 태어난 두 사람은 양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광기라는 20세기의 재앙 속에서 휴머니즘과 평화주의의 불꽃을 펜끝에 피워올렸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한 사람(반룬)은 서쪽(미국)에서 쉼없이 글을 썼고, 다른 한 사람(츠바이크)는 동쪽(유럽)에서 지칠 줄 모르고 원고지를 메웠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관심의 다양함과 문체의 독특함으로 1급 작가의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20세기의 광란이 종결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반룬은 미국 코네티컷의 작은 마을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고, 츠바이크는 망명지 브라질에서 시대가 안겨준 질병 우울증에 가위눌려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했다. 그들의 명성에 걸맞게 국내에도 두 사람을 흠모하는 열렬한 추종자들이 있고, 그런 만큼 그들의 책도 여러 종이 번역돼 나와 있다. 출판사 서해문집의 김흥식 사장은 반룬 애호가에 속한다. 출판인으로서 그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반룬 전집을 펴내는 것인데, 그 오랜 소망이 첫 열매를 맺었다. ‘반룬 전집’ 일차분으로 <발명 이야기> <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 <관용> 세 권이 한꺼번에 나온 것이다. 출판사는 이 책들에 이어 20여 권에 이르는 반룬 작품을 차례로 펴낼 예정이다. 반룬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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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철자가 알려주듯 반룬은 미국 태생이 아니다. 그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나 20살에 미국으로 이주한 뒤 대학에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차대전 중에 유럽에서 종군기자로 전쟁을 취재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국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왕성한 창조력으로 작품을 생산했다. 츠바이크의 옆에 세워 놓으면 반룬의 개성이 좀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츠바이크가 역사적 인물에 깊이 천착해 그들의 초상화를 정밀하고도 강렬하게 그려냄으로써 전기작가로 이름값을 높였던 것과 달리, 반룬의 관심은 역사·철학·예술·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으며, 그것을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냄으로써 교양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똑같은 휴머니즘과 평화주의지만 두 사람의 정신은 그들이 구사한 문체에서 명료한 빛깔로 대비된다. 츠바이크가 비극적이라면 반룬은 희극적이다. 츠바이크가 열정적이라면 반룬은 냉정하다. 츠바이크의 글이 폭주하는 기관차라면 반룬의 글은 천천히 달리는 유람열차에 가깝다. 츠바이크가 소설적 장치 속에서 직설적 언어를 쏟아낸다면 반룬은 우화적 형식 속에서 풍자적 언어를 구사한다. 그러나 뜨거운 직설과 은근한 풍자는 서로 만나 인간의 어리석음을 폭로한다.
이를테면, 두 사람의 이 대조적 개성은 위대한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1535)를 다룰 때 문체의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인간의 몽매와 타락에 맞서 싸우면서 동시에 관용(톨레랑스)를 외쳤던 에라스무스는 반룬의 <관용> 한 장을 차지하며 이렇게 그려진다. “관용을 위해 싸웠던 이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서로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의 신념엔 의심이 섞여 있었다는 것.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을 수도 있었지만 그 생각이 철저한 확신으로 굳어지는 지경에는 결코 이르지 않았다.” 이어 반룬의 비유법은 이 회의하면서 진보하는 사람을 이렇게 묘사한다. “간단히 말해 세상에서 진짜 쓸모 있는 것은 모두가 합성물인데, 신념만 예외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우리 ‘확신’의 밑바탕에 ‘의심’이라는 불순물이 어느 정도 들어 있지 않는 한, 우리의 신념은 순수한 은으로 만든 종처럼 경망스러운 소리를 낼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회의는 무한한 확신을 품고서 직선으로 내달렸던 루터를 향한 것이었다.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는 그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대결을 특유의 문체로 요리한다. “이 두 사람의 정신성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고 세계에서 발원한다. 에라스무스는 의심의 여지 없이 폭넓은 시야를 지닌 사람이고 박학다식한 사람이다. 삶의 어떠한 것도 낯설지 않다. 그의 보편적 오성은 마치 햇빛처럼, 수많은 비밀의 틈새와 이음새 사리오 색깔없이 투명하게 밀려들어 모든 대상을 밝게 비춘다. 반면에 루터는 폭은 좁지만 깊이는 에라스무스를 능가한다. 그의 세계는 에라스무스의 세계보다 좁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모든 사상에, 자기의 모든 설득에 활기를 불어넣을 줄 안다. 그는 모든 것을 안으로 끌어들여 자기의 붉은 피로 뜨겁게 가열한다.” 역사는 루터의 승리, 에라스무스의 패배로 기록한다. 그러나 반룬이나 츠바이크 모두 에라스무스 편에 서 있었다. 츠바이크는 “이성의 시대는 온다, 언젠가 그 시대는 온다”라고 끝을 맺었고, 반룬은 “그의 풍자 정신은 끝까지 그를 떠나지 않았다”라고 선언하며 은근한 낙관으로 글을 마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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