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 지향 장편 4편 ‘서사의 회복’은 한국 소설에 주어진 정언적 명령과 같았다. 미학주의와 내면 탐구가 소설의 주류를 형성한 90년대 이후 한국 소설은 심각한 서사의 결핍을 드러내 왔기 때문이다. 서사, 곧 이야기의 회복이야말로 ‘죽음’까지도 운위되고 있는 한국 소설의 출구라는 인식이 보편화했다. <다빈치 코드>와 같은 베스트셀러 번역소설의 ‘성공’ 비결이 사실(fact)에 허구(fiction)를 가미한 ‘팩션’에 있다는 주장이 대두하면서 한국 소설의 서사적 가난은 한층 초라하게 부각되었다. 진단 옳았으나 처방이 문제 그런 위기감의 결과인지, 최근 출간된 장편소설들은 뚜렷한 서사 지향성을 보인다. 일단은 바람직한 현상이겠지만, 이번에는 서사의 과잉 내지는 왜곡이라는 반대 방향의 문제를 노정하고 있는 듯하다. 진단은 올발랐지만 처방이 그릇됐달까. 이인화씨의 <하비로>(해냄)와 김탁환씨의 <부여현감 귀신 체포기>(이가서), 그리고 신인들의 장편공모 당선작인 조하형씨의 <키메라의 아침>(열림원)과 천명관씨의 <고래>(문학동네)가 해당 소설들이다. 이 소설들은 하나같이 풍성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가 책장을 넘기는 독자의 마음을 바쁘게 한다. 이런 정도라면, 재미가 없어서 소설을 안 읽는다는 불평의 말은 쏙 들어갈 것 같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왠지 허전하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하자는 서사인가; 이 이야기들의 문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소설은 단지 이야기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 <하비로>는 독자를 1930년대 중국 상하이로 데려간다. 태평천국운동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교집단과 암흑가 갱들, 그리고 일단의 조선인 문화 건달들이 얽히고 설키며 빚어지는 음모와 비밀, 살인과 복수의 유혈낭자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충실한 고증과 작가의 풍부한 역사지식이 돋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역시 ‘홍콩 누아르’의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 기억 상실과 사랑의 회복이라는, 주인공의 절실한 실존적 문제는 총성과 핏물, 도피와 추적의 현란한 ‘액션’에 가려 종적이 묘연해진다.
액션·판타지…영화에 투항? <부여현감 귀신 체포기>는 ‘지괴(志怪)소설’이라는 레테르를 달고 있다. 한마디로 귀신에 관한 소설이라는 뜻이다. 고전소설 <전우치전>의 주인공 전우치와 그의 친구인 부여현감, 그리고 신비한 여승 미미가 힘을 합쳐 온갖 귀신들을 물리친다는 이야기 모음이다. 작가와 출판사는 언필칭 ‘한국적 판타지’를 자임하는데,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판타지라 규정한다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다. 문학 향취 사라진 문장의 해일 <하비로>는 영화를 연상케 하는 빠른 장면 전환이 일품이고, <부여현감 귀신 체포기>의 작가는 “이 소설이 드라마나 영화 시리즈물로 바뀌기를 희망”하고 있다. <키메라의 아침>과 <고래>의 작가들이 각각 영화평론과 시나리오로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이쯤 되면 소설에 대한 영화의 습격, 또는 영화에 대한 소설의 투항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 정도다. 거의 무목적적으로 보이는 <고래>의 이야기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사건과 상황을 나열하는 건조한 기능뿐, 문학적 향취를 느끼기 어려운 문장들의 해일이라니! 네 편의 소설 중 가장 나은 편인 <키메라의 아침>에서도 작가는 악몽과 같은 허구의 세목을 시시콜콜히, 그리고 파편적으로 재현하는 재미에 빠져서 좀 더 깊이있는 통찰을 보이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네 편의 소설은 확실히 풍부한 이야기를 내장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들은 서사와 문학성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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