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발표에 가면 나는 으레 앞줄 가운데서 듣는다. 발표가 끝난 뒤 진행자가 질문을 받을 터이니 백지에 적어내면 가려서 뽑겠다고 했다. 나는 “할말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무 대학 아무개”라고 적어냈더니 마침 질문자로 뽑혔다.
마이크를 잡았다. “개화라는 말은 침략국이 사용하던 속임수 용어로서, 일본말이다. 개화라는 말을 처음으로 썼던 사람이 갑오왜란 때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대조규개)였다. 1894년 6월22일 왜인 ‘대조’가 우리 임금을 보고 ‘지금부터 개화하시오’라고 했던 것이다. 야만을 떨치는 것을 개화라고 한다. 1894년이 갑오년인데, 일본 역사책이 조선국 ‘갑오개혁·갑오개화·갑오경장’이라고 적는다. 갑오년이 개화라고 하면, 세종 등 그 이전의 모든 임금들은 야만국 임금이 된다. 1894년 갑오년이 ‘경장’이라고 하면, 16년 뒤 1910년에 나라가 망했는데, 그 행위를 르네상스 경장으로 이름을 줄 수 없다. 원인과 결과를 하나되게 궤뚫는 것을 역사법칙으로 삼아야 한다. 갑오년으로부터 16년 뒤 경술국치로 배달겨레가 실국했는데, 이를 개화·경장이라고 하는 것은 마친짓 아니랴…”고 했다.
진행자가 직권으로 “이 질문의 답은 정한모 교수가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정 교수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소장학자 려 교수의 질문을 받고 보니, 우리나라 장래가 든든하게 느껴집니다” 했다. 그때 장 단장이 벌떡 일어나서 “그럼 대안을 내어보시오!” 고함을 질렀다. 내가 일어나 ‘갑오망조’를 말하려는 찰나에 진행자가 “질의자에게 대안을 내놓으라는 것은 잘못”이라 하고는 “가칭 개화기 발표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하고 끝냈다.
진행자는 순발력이 뛰어났고, 정 교수자는 부드러운 말하기에 뛰어난 이였다.
려증동/경상대 명예교수·배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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