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패밀리사이트

  • 한겨레21
  • 씨네21
  • 이코노미인사이트
회원가입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6.02 19:10 수정 : 2005.06.02 19:10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 발행인

아인슈타인이 생애 말년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만약 다시 일생을 살게 된다면 결코 과학자가 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꽤 알려진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로 이 세계가 가공할 핵전쟁의 위험 속에 빠진 현실에 절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현재의 상황에서 내가 선택하고 싶은 유일한 직업은 지식추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 즉, 배관공과 같은 일이라고 토로하였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경우는 드물기는 하지만, 예외적인 게 아니다. 특히 2차세계대전 이후 과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연구결과로 지구가 갈수록 거주불가능한 곳으로 되어간다는 데 대하여 크게 우려하고 괴로워하면서, 종래의 연구방식을 변경하거나 포기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과학자들은 아마도 남달리 예민한 감수성과 양심의 소유자들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적인 자질이나 성향을 떠나서, 정말 문제는 이러한 과학자들을 견딜 수 없게 하는 현대적 과학연구의 근본경향일 것이다.

비엔나(빈) 출신의 미국 콜럼비아 대학 교수였던 생화학자 에르빈 샤르가프는 DNA의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 결정적인 공로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90살을 훨씬 넘긴 긴 생애 동안 서양 고전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와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다양한 주제에 걸쳐 저술활동을 계속했는데, 그 중 핵심적인 것은 현대 과학문명과 과학연구의 현실에 대한 그의 집요하고 날카로운 비판적 에세이들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의 자연과학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그리고 외경의 염을 불러일으키는 자연의 장엄함이라고 하는 관점에 대한 쉴새없는 공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연과학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상호 연관되어 있어서 한 쪽이 사라지면, 다른 쪽도 사라질 운명에 있다. 정신의학, 심리학, 정신분석에 의한 인간영혼의 고체화와 물질화에 이어서 이제 인간의 신체도 단순한 연구재료가 되어버렸다…인간의 태아가 다른 인간을 위한 재료로서 생산되는 미래의 공장은 결코 더 이상 공상이 아니다.” 샤르가프는 상황이 이렇게 뒤틀려버리게 된 것은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악마의 교의(敎義)’가 현대과학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전형적인 예가 핵분열과 생명조작 기술이라고 지적한다.

배아 줄기세포 연구는 인간 초기생명을 재료 이용 이번 ‘쾌거’에 대해
윤리의식 부재 비판도 가능 무병장수 현실 된다면 가공할 디스토피아일 것

국내의 한 연구팀이 배아줄기세포 연구라는 이른바 첨단 생명공학 분야에서 또다시 선구적인 업적을 세웠다고 해서 지금 한국사회는 온통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연구가 구체적으로 자기들에게 어떤 이익을 어떻게 가져다줄 것인지 아무런 이해도 없이 덮어놓고 환호하고 있다. 아마도 이번 연구의 성과로 한국인들의 국제적 위신이 크게 높아졌다는 의식이 이런 분위기의 바탕에 깔려 있는지 모른다. 게다가, 이 연구의 결과로 앞으로 막대한 부가가치가 생겨나서 한국의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될 거라고 하지 않는가. 연구 책임자가 어느새 민족의 영웅이 되고, 따라서 그에게 국가 최고급의 경호를 포함한 온갖 특혜조치가 강구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이 연구가 조만간 난치병 극복에 획기적인 의료기술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난치병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는 아마도 이보다 더 큰 복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에는 허다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이 연구가 쉽사리 인간복제로 이어질 위험성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동안 제기되어온 연구방식 자체의 비윤리성도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연구는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맹아상태의 인간의 초기생명을 ‘재료로’ 이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따져 보면 인간 공동체의 가장 기초적인 도덕적 기반을 훼손하는 행위일 수 있다. 이른바 문명국가들에서 생명윤리의 이름으로 이런 종류의 연구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의 과학기술적 ‘쾌거’는 그러한 윤리의식 혹은 윤리적 규제의 부재의 소산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정말 민족적 긍지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찬양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연구에 대한 열광적인 찬양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냉철한 성찰과 비판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한겨레>의 조홍섭 기자는 이 상황에 대하여 “어딘가 전체주의 냄새가 난다”고 썼다. 나는 작고한 일본의 정치사상가 후지타 쇼조의 말을 빌려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생명조작에 의한 의료기술의 궁극적 지향은 무병장수의 세상이라고 한다. 무병장수의 꿈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욕망이겠지만, 그러나 정말 질병없는 세상이 현실이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가공할 디스토피아일 것인가. 모든 전통문화는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 근본은 우리가 인간존재의 궁극적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가르쳐왔다. 삶의 기술은 본질적으로 고통을 견디고, 죽음에 순응하는 기술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질병도, 고통도, 시련도, 죽음도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의 삶은 심히 공허하고 천박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제성장이라는 신(神)을 오랫동안 섬겨오는 동안에 어느새 이러한 삶의 근본이치도 망각해버릴 만큼 우리의 정신은 마비되고 빈곤해졌는지 모른다.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는 실로 무서운 억압체제이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