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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3
집착이 많을수록 무거운 삶을 산다짐의 무게는 그 사람 집착의 무게
때문에 어떤 사람은 아예 떠나지도 못한다
아메리카 횡단 여행의 출발지 버지니아주 요크타운(Yorktown)에 도착했을 때는 마치 종착지에 도착한 듯했다. 여행을 준비해서 출발지까지 오는 데 진이 다 빠졌기 때문이다.
자전거와 짐수레를 비행기에 싣고 오는 것은 돼지 서너 마리를 몰고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날 자전거와 짐수레를 각각 분해해서 담으려고 했더니 어마어마한 상자들이 필요했다. 항공사 웹사이트에서 확인해본 결과 상자의 높이와 아래 사각형의 두 변을 더한 총길이가 62인치(157.48 센티미터)를 초과할 경우 80달러를 물어야 하고 82인치(208.28 센티미터)를 초과하면 아예 적재할 수 없다고 나와 있었다. 자전거 상자는 62인치를 가볍게 통과해서 82인치마저 살짝 초과했다. 짐수레 상자는 63인치로 적재는 가능한데 역시 초과요금을 물어야 할 판.
출발 당일 아침 미니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부려놓으니 이민 가는 것보다 짐이 많다. 탁구대 반만한 크기의 상자 두 개에다 랩탑 컴퓨터와 한 살림 우겨 넣은 가방, 그리고 사진기 가방까지 모두 4개. 공항 청사 밖에 있는 짐 수속 카운터에서 “그렇게 큰 자전거 상자는 공항 안의 항공권 발부 카운터로 가져가라”고 접수를 거부했다. 어떻게 한눈에 자전거 상자인줄 알까 생각해보니 내가 입고 있던 사이클 셔츠가 단서였다. 흰색 바탕에 검정 빨강 노랑 녹색의 가지 각색의 줄무늬가 있고 자동차 회사 볼보의 이름이 덕지덕지 인쇄돼 있다. 사이클 선수들은 자동차 운전자한테 안 치이기 위해 눈에 잘 띄도록 화려한 무늬의 옷을 선호한다. 자전거를 탈 때가 아니면 입고 다니기가 민망할 만큼 요란하다.
창피한 줄 알면서도 항공기를 타는 데 사이클 셔츠를 입은 것은 캐주얼 한 벌이라도 짐에서 줄이기 위해서였다. 짐 싸는 과정은 자신의 취향과 성격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요크타운에서 만난 브라이언 페트리치(Brian Petritsch)는 78년 미국 횡단 자전거 여행을 할 때 낚싯대를 가져갔다고 한다. 중간중간 물고기를 잡아 먹으면서 단백질을 보충하겠다는 야무진 생각이었지만 딱 두 번 사용했다고 한다. 요크타운에서 숙박을 한 은총 감독교회(Grace Episcopal Church)의 사택 찬장에서 무려 1.87㎏의 케찹 병이 나왔다. 이 찬장은 서부에서 출발해 요크타운에서 횡단여행을 끝낸 사람들이 여행을 시작할 사람들을 위해 놓고 간 것들을 보관하고 있다. 주로 즉석에서 영양을 보충할 수 있는 간이식품들인데 가정에서도 쓰지 않는 덕용 크기의 케찹은 뜻밖이었다. 내 기준으로 보면 길바닥에 뿌리고 가면서 지나간 길을 표시하는데 쓰지 않는 한 몇 년이 걸려도 못 먹을 양이다. 케찹광인 어떤 사람이 여행 도중 케찹을 먹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큰 통을 사놓고 갔을 수도 있다. 여행을 출발하는 사람들에게 한번 들고 갈 테면 가봐라 하면서.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데도 들고 간 것을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고참기자인 데이비드 램(David Lamb)은 사진기를 넣어갔다가 한번도 꺼내보지 않았다고 한다. 피곤하면 만사가 귀찮아지는 것 같다.
텐트에서 3분자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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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내 삶의 무게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지고 산다. 집착이 많을수록 무거운 삶을 산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짐의 무게는 그 사람 집착의 무게다. 어떤 사람은 아예 떠나지 못한다. 이를테면 수세식 화장실을 짊어지고 갈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냥 집에 있거나 여관 등에 머무는 쪽을 택한다. 내 경우는 떠나긴 하지만 두 배는 힘들게 간다. 만약 간이 샤워기가 있었으면 이것도 짊어지고 갔을 것이다.
이 40㎏의 짐에다 항공기를 타기 위해서는 자전거와 짐수레도 상자에 넣어가야 하니 감당불능의 중량과 가짓수다. A 지점에서 B 지점까지 최소한 세 차례에 걸쳐서 날라야 하는데 B 지점으로 짐을 옮기다 보면 A 지점에 놔둔 짐이 없어질까봐, A 지점으로 오면 B 지점에 옮겨둔 짐이 걱정이다. 해결책은 무지 빠르게 A와 B 두 지점을 왕복하는 것인데 공항 밖에서 공항 안 항공권 발부 카운터까지 그 무거운 짐들을 나르려니 숨이 턱까지 찬다. 평소에 미국 할머니들을 다정한 친구로 여겨온 데 대해 보답이라도 하듯 한 할머니가 짐을 지켜봐 주겠다고 해서 마음을 놓고 나머지 짐들을 옮겼다.
항공기 추가요금 실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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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사이클셔츠에 머리엔 안전모자
승객들의 빈정거림이 들려온다
“9 ·11 이후 새로운 안전규정인가 보지?”
출발시간이 거의 다 돼서 허겁지겁 기내에 입장했더니 승객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오랜만에 진풍경을 본다는 표정들. 깜박 잊고 자전거 헬멧을 자전거 상자 안에 집어넣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무거운 가방 두 개를 들어야 했기 때문에 헬멧을 들 수가 없어 머리에 썼다. 신시내티로 가는 오전 10시55분발 델타 항공의 승객들은 민항 역사상 드물게 자전거 헬멧을 쓰고 타는 엽기적인 승객을 목격하고 있었다. “저게 9.11 이후 새로운 안전 규정인가 보지?”라는 빈정거림이 들려온다. 하지만 이 엽기 승객은 마침내 항공기에 탑승했다는 성취감에 마치 사열하는 기분으로 승객들을 훑어보면서 맨 뒷줄에 있는 좌석으로 뒤뚱거리며 걸어갔다.
승무원 질문에 엉뚱 대답 망신
음료수를 나눠주던 승무원이 뭐라고 물었다. 항공기 소음 때문에 잘 안 들렸다. (청력이 안 좋다는 얘기 상기하시라) “버지니아 주 요크타운에서 오리건주 애스토리아까지 자전거로 횡단할 계획”이라고 답한 뒤 미심쩍어 “그걸 물어본 거냐”고 물어봤더니 옆 좌석의 승객이 “아니, 랜스 암스트롱이 올해도 투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할 것 같으냐고 물어봤다”고 말했다. 이렇게도 동문서답을 할 수 있을까. 자전거 복장과 헬멧만 아니면 이런 질문도 안 받을 텐데 불필요한 망신을 계속 사고 있는 중. 당황해서 그냥 우승할 거라고 답한 뒤 대화를 거부하며 눈을 감았다. 프랑스를 종주하는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를 여섯 차례 연속 우승한 암스트롱은 “나는 고통받는 것을 즐긴다” 라고 멋들어지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럼 한번 내가 오늘 오전에 겪은 망신과 소동도 즐길 수 있을지 직접 해보지 그래, 그런 삐딱한 심정이다.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심신이 고단하다. 신시내티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요크타운 인근에 있는 뉴포트 뉴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불길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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