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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2 19:41 수정 : 2006.01.18 17:02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3

집착이 많을수록 무거운 삶을 산다
짐의 무게는 그 사람 집착의 무게
때문에 어떤 사람은 아예 떠나지도 못한다

아메리카 횡단 여행의 출발지 버지니아주 요크타운(Yorktown)에 도착했을 때는 마치 종착지에 도착한 듯했다. 여행을 준비해서 출발지까지 오는 데 진이 다 빠졌기 때문이다.

자전거와 짐수레를 비행기에 싣고 오는 것은 돼지 서너 마리를 몰고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날 자전거와 짐수레를 각각 분해해서 담으려고 했더니 어마어마한 상자들이 필요했다. 항공사 웹사이트에서 확인해본 결과 상자의 높이와 아래 사각형의 두 변을 더한 총길이가 62인치(157.48 센티미터)를 초과할 경우 80달러를 물어야 하고 82인치(208.28 센티미터)를 초과하면 아예 적재할 수 없다고 나와 있었다. 자전거 상자는 62인치를 가볍게 통과해서 82인치마저 살짝 초과했다. 짐수레 상자는 63인치로 적재는 가능한데 역시 초과요금을 물어야 할 판.

출발 당일 아침 미니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부려놓으니 이민 가는 것보다 짐이 많다. 탁구대 반만한 크기의 상자 두 개에다 랩탑 컴퓨터와 한 살림 우겨 넣은 가방, 그리고 사진기 가방까지 모두 4개. 공항 청사 밖에 있는 짐 수속 카운터에서 “그렇게 큰 자전거 상자는 공항 안의 항공권 발부 카운터로 가져가라”고 접수를 거부했다. 어떻게 한눈에 자전거 상자인줄 알까 생각해보니 내가 입고 있던 사이클 셔츠가 단서였다. 흰색 바탕에 검정 빨강 노랑 녹색의 가지 각색의 줄무늬가 있고 자동차 회사 볼보의 이름이 덕지덕지 인쇄돼 있다. 사이클 선수들은 자동차 운전자한테 안 치이기 위해 눈에 잘 띄도록 화려한 무늬의 옷을 선호한다. 자전거를 탈 때가 아니면 입고 다니기가 민망할 만큼 요란하다.

창피한 줄 알면서도 항공기를 타는 데 사이클 셔츠를 입은 것은 캐주얼 한 벌이라도 짐에서 줄이기 위해서였다. 짐 싸는 과정은 자신의 취향과 성격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요크타운에서 만난 브라이언 페트리치(Brian Petritsch)는 78년 미국 횡단 자전거 여행을 할 때 낚싯대를 가져갔다고 한다. 중간중간 물고기를 잡아 먹으면서 단백질을 보충하겠다는 야무진 생각이었지만 딱 두 번 사용했다고 한다. 요크타운에서 숙박을 한 은총 감독교회(Grace Episcopal Church)의 사택 찬장에서 무려 1.87㎏의 케찹 병이 나왔다. 이 찬장은 서부에서 출발해 요크타운에서 횡단여행을 끝낸 사람들이 여행을 시작할 사람들을 위해 놓고 간 것들을 보관하고 있다. 주로 즉석에서 영양을 보충할 수 있는 간이식품들인데 가정에서도 쓰지 않는 덕용 크기의 케찹은 뜻밖이었다. 내 기준으로 보면 길바닥에 뿌리고 가면서 지나간 길을 표시하는데 쓰지 않는 한 몇 년이 걸려도 못 먹을 양이다. 케찹광인 어떤 사람이 여행 도중 케찹을 먹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큰 통을 사놓고 갔을 수도 있다. 여행을 출발하는 사람들에게 한번 들고 갈 테면 가봐라 하면서.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데도 들고 간 것을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고참기자인 데이비드 램(David Lamb)은 사진기를 넣어갔다가 한번도 꺼내보지 않았다고 한다. 피곤하면 만사가 귀찮아지는 것 같다.


텐트에서 3분자장까지

자전거 여행 전문가들이 권하는 요령은 꼭 필요한 것만으로 짐을 싼 뒤 거기서 딱 반을 집에 놓고 가라는 것이다. 짐싸기 성격 테스트 결과 역시 나는 과단성이 없는 성격으로 나타났다. 텐트, 슬리핑 백, 슬리핑 패드, 풍로, 코펠이라는 말로 통하는 간이 냄비와 대접 세트, 숟가락, 젓가락, 가스통, 캔들 랜턴, 옷가지, 구급약, 수건, 쌀, 김, 고추장볶음, 멸치볶음, 3분 짜장, 3분 카레, 즉석 북어국, 즉석 미역국, 샌달, 수영복, 수영안경, 농구복 등은 도저히 놓고 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거기에다 책 5권, 여분의 타이어, 자물쇠 2개, 비상 호루라기, 부싯돌, 나침반, 정수기 등을 선택 사항으로 집어넣었다. 비상 호루라기를 불어 구조를 요청하고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부싯돌을 비벼서 불을 피우고 시냇물을 정수기로 걸러서 마셔야 할 상황이 과연 올까 싶기는 했다. 더군다나 책 5권을 읽을 만큼 여유가 있을까. 그 전의 경험에 비춰보면 여행에 가져간 책을 끝까지 읽은 적이 없었다. 이게 필요할까 하는 의심이 조금이라도 드는 물품을 무조건 놓고 가라는 게 유경험자들의 조언이었지만 그 숱한 의심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했다. 그 결과 자전거 횡단 역사상 아마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엄청난 무게의 짐이 탄생했다. 집에 있는 체중기에 짐들을 달아보니 거의 40㎏에 육박했다. 데이비드 램의 경우 짐 무게가 모두 35 파운드(15.8㎏)였다. 그는 내 짐의 반도 안 되는 이 무게를 싣고 출발하다 균형을 못 잡고 넘어져 무릎이 깨진 뒤 여행을 포기하자는 유혹에 시달렸다.

이게 내 삶의 무게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지고 산다. 집착이 많을수록 무거운 삶을 산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짐의 무게는 그 사람 집착의 무게다. 어떤 사람은 아예 떠나지 못한다. 이를테면 수세식 화장실을 짊어지고 갈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냥 집에 있거나 여관 등에 머무는 쪽을 택한다. 내 경우는 떠나긴 하지만 두 배는 힘들게 간다. 만약 간이 샤워기가 있었으면 이것도 짊어지고 갔을 것이다.

이 40㎏의 짐에다 항공기를 타기 위해서는 자전거와 짐수레도 상자에 넣어가야 하니 감당불능의 중량과 가짓수다. A 지점에서 B 지점까지 최소한 세 차례에 걸쳐서 날라야 하는데 B 지점으로 짐을 옮기다 보면 A 지점에 놔둔 짐이 없어질까봐, A 지점으로 오면 B 지점에 옮겨둔 짐이 걱정이다. 해결책은 무지 빠르게 A와 B 두 지점을 왕복하는 것인데 공항 밖에서 공항 안 항공권 발부 카운터까지 그 무거운 짐들을 나르려니 숨이 턱까지 찬다. 평소에 미국 할머니들을 다정한 친구로 여겨온 데 대해 보답이라도 하듯 한 할머니가 짐을 지켜봐 주겠다고 해서 마음을 놓고 나머지 짐들을 옮겼다.

항공기 추가요금 실랑이

항공사 직원은 자전거 상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망설이다 실어주기로 했다. 대신 초과요금을 물렸다. 거기까진 예상한 거여서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짐수레 상자까지 초과 요금을 물리면서 모두 160달러를 내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항공권이 120달러인데 짐 초과 요금으로 160달러를 내라고 하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시계를 보니 탑승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이 직원은 귀찮은 녀석 하나 만났군 하는 기분으로 큰 자를 가져와서 길이를 재면서 “봤지, 허용 길이를 넘잖아” 하고 말했다. 상자의 생김새가 윗변이 좁고 밑변이 넓은 평행사변형처럼 생겨서 밑변을 기준으로 하면 길이가 길어지는데 이 직원은 이 변을 기준으로 쟀다. 따지니까 그럼 중간을 재겠다고 해서 중간을 재니 역시 여유 있게 초과요금 기준 62인치를 훌쩍 넘었다. 점점 사정조로 내 목소리가 바뀌는 것을 느끼면서 윗변을 기준으로 해달라고 했다. 정말 찰거머리 같은 녀석 다 보겠네 하는 표정으로 자를 갖다 댔다. 집에서 내가 잰 대로 기준에서 1인치 초과하는 63인치가 나왔다. 내 뒤로 승객들의 줄이 길어지고 있었고 바쁜 승객들은 성마른 표정으로 희한한 측량 소동을 지켜봤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63인치면 봐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그렇지만 우린 가장 짧은 변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어떤 변을 기준으로 한다는 규정을 본 적이 없다.” 그 여자는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한테 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역시 초과요금을 내야 한다는 해석. 마지막으로 “이건 당신의 관대함에 달린 문제 아니냐”고 말해봤다. 관대함이라는 말이 그처럼 놀라운 효과를 발휘할 줄이야.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80달러만 초과요금으로 부과하면서 “다음에는 상자를 기준에 잘 맞춰오라”고 했다.

알록달록 사이클셔츠에 머리엔 안전모자
승객들의 빈정거림이 들려온다
“9 ·11 이후 새로운 안전규정인가 보지?”

출발시간이 거의 다 돼서 허겁지겁 기내에 입장했더니 승객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오랜만에 진풍경을 본다는 표정들. 깜박 잊고 자전거 헬멧을 자전거 상자 안에 집어넣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무거운 가방 두 개를 들어야 했기 때문에 헬멧을 들 수가 없어 머리에 썼다. 신시내티로 가는 오전 10시55분발 델타 항공의 승객들은 민항 역사상 드물게 자전거 헬멧을 쓰고 타는 엽기적인 승객을 목격하고 있었다. “저게 9.11 이후 새로운 안전 규정인가 보지?”라는 빈정거림이 들려온다. 하지만 이 엽기 승객은 마침내 항공기에 탑승했다는 성취감에 마치 사열하는 기분으로 승객들을 훑어보면서 맨 뒷줄에 있는 좌석으로 뒤뚱거리며 걸어갔다.

승무원 질문에 엉뚱 대답 망신

음료수를 나눠주던 승무원이 뭐라고 물었다. 항공기 소음 때문에 잘 안 들렸다. (청력이 안 좋다는 얘기 상기하시라) “버지니아 주 요크타운에서 오리건주 애스토리아까지 자전거로 횡단할 계획”이라고 답한 뒤 미심쩍어 “그걸 물어본 거냐”고 물어봤더니 옆 좌석의 승객이 “아니, 랜스 암스트롱이 올해도 투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할 것 같으냐고 물어봤다”고 말했다. 이렇게도 동문서답을 할 수 있을까. 자전거 복장과 헬멧만 아니면 이런 질문도 안 받을 텐데 불필요한 망신을 계속 사고 있는 중. 당황해서 그냥 우승할 거라고 답한 뒤 대화를 거부하며 눈을 감았다. 프랑스를 종주하는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를 여섯 차례 연속 우승한 암스트롱은 “나는 고통받는 것을 즐긴다” 라고 멋들어지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럼 한번 내가 오늘 오전에 겪은 망신과 소동도 즐길 수 있을지 직접 해보지 그래, 그런 삐딱한 심정이다.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심신이 고단하다. 신시내티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요크타운 인근에 있는 뉴포트 뉴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불길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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