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첫 소설집 <카스테라>의 출간에 즈음해 만난 박민규는 7년 동안 기른 머리를 짧게(?) 잘라 레게 스타일로 다듬고 지미 헨드릭스 식의 선글라스를 쓴 차림이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
등장부터가 문제적이었다. 2003년 여름, 그는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에 경장편 <지구영웅전설>이, 한겨레문학상에 장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한꺼번에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등단했다. 미국 대중문화의 영웅들이 대거 출현하는 <지구영웅전설>이나, ‘패배의 화신’과도 같았던 초창기 한국 프로야구팀 삼미 슈퍼스타즈가 회고되는 <…마지막 팬클럽>이나 발칙한 발상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대번에 21세기를 여는 한국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주목받았다.
소설과는 무관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긴 생머리에 검은 선글라스가 ‘트레이드 마크’인 그의 외양 역시 눈길을 끌었다. 90년대 중반 귀고리를 한 차림으로 문단에 ‘충격’을 주었던 김영하의 경우를 떠오르게도 했다. 게다가 그는 밴드의 로커로 활동하는 한편 이종격투기와 프로레슬링 따위를 즐긴다고도 알려졌다.
2004년 여름호 계간 <대산문화>에 그는 <좃까라 마이싱이다!>라는 글을 발표했다. 에세이였다. 같은 잡지 봄호에서 선배 문인들이 그 또래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우려 섞인 조언을 했던 데 대한 ‘대답’이었다. 도무지 선배에 대한 예의라고는 모르는 듯 무엄한 제목부터가 작지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본문 역시 결코 예의바르다고는 하기 어려웠으니, 가령 이러했다. 잡지 편집자가 제시한 네 개의 질문 중 뒤의 두 질문에 대해 답한 부분이다.
“③독자나 평론가들이 자신의 소설에 대해 오해, 오독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답: 누구에게나, 꼴린 대로 생각할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④자신을 비롯한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대한 선배 문인들의 평가(<대산문화> 2004년 봄호)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답: 수고하셨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나도, 열심히 하겠다.”
박민규의 이런 거침없는 발언은 작가로서 나름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터이다. 같은 글에서 그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시간이, 없다”고도 밝혔다. 아닌 게 아니라 등단 이후 그는 부지런히 쓰고 또 썼다. 일단의 소설가와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한 어떤 조사에서는 그의 단편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가 지난해의 최고 소설로 뽑히기도 했다. 소설집 <카스테라>(문학동네)는 2년 전의 화려한 등단 이후 박민규가 내놓는 첫 책이다.
‘카스테라’
책에는 10개의 단편이 묶였다. 지미 헨드릭스의 데뷔 앨범 <너 해봤니?(Are You Experienced?)>와 같은 열 개의 트랙으로 구성되었노라고 그는 설명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박민규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백수거나 ‘알바’거나 인턴 사원이거나 대학생처럼 유예된 신분의 사람들이다. 유예되었다는 건 다른 말로 경계선상에 놓였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들은 그러니까 순수와 미경험의 세계에서 경험과 타락의 세계로 옮겨 가는 도정에 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편의점 점원과 지하철 푸시맨 같은 아르바이트에 종사해야 하는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고교생, 아버지의 부도 여파로 열악한 고시원에 기거하는 <갑을고시원 체류기>의 대학생, 학교 근처 원룸에서 요란한 소음을 내는 냉장고와 ‘동거’해야 했던 <카스테라>의 대학생, 전문대를 졸업한 뒤 일흔세 곳에 이력서를 넣었어도 끝내 취직에 실패한 뒤 한적한 유원지를 임시 직장으로 택한 <아, 하세요 펠리컨>의 주인공, ‘인턴’ 사원의 꼬리표를 떼기 위해서라면 동성인 직장 상사의 성 노리개 노릇도 마다 않는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의 주인공 등이 한결같이 그러하다.
‘삼미 슈퍼스타즈…’로 화려한 등단뒤
2년만에 첫 단편집 ‘카스테라’ 내놔
알바, 인턴등 경계선상 젊은이 통해
‘청년실업’ 현실과 세상의 냉혹성 고발
‘인터넷 글쓰기’ 방식 성공적 결과 불구
때론 의미없는 말의 유희로 떨어지기도
안정된 직장과 충분한 보수를 확보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젊은이들의 면모는 ‘청년실업’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당대 현실의 정직한 반영으로 볼 수 있겠다. 그들이 순수의 세계에서 경험의 세계로 입문하는 과정은 세계의 냉혹성과 자신의 열악한 상황에 대한 쓰라린 확인을 수반한다. “나이 마흔다섯에 시간당 삼천오백원”(72쪽)이라는 ‘아버지의 산수’를 확인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주인공은 “이상하게 그날 이후(…)조용한 소년이 되어버렸다.”(72쪽) 비슷한 상황에서 <갑을고시원 체류기>의 대학생 역시 “갑자기 어른이 된 느낌이었고, 왠지 이 세계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281쪽)
‘스테이지 23’에서 막힌 인생
그들이 알게 된 세계란 어떤 것이었나. 한마디로 “세상은 엉망이다.”(47쪽) “인간이 너구리로 변하는 세상”(52쪽)이니 말 다 한 것 아닌가. 너구리로 변하다니? 이런 말이다: 너구리가 주인공인 게임이 있다. ‘스테이지 23’까지는 문제 없이 나아간다. 바로 그곳, 스테이지 23에서 막힌다. 대부분의 우리에게 그곳에서 더 이상 나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스테이지 23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자들은 죄다 너구리가 되어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니 ‘스테이지 23’이야말로 “이 세상의 실제 이름”(49쪽)이라는 말이다. 스테이지 23으로서의 세상의 본질을 알게 된 인턴 사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사회란 무서운 것이구나.”(54쪽) 푸시맨 소년은 같은 상황을 이렇게도 표현한다: “세상은 하나의 열차다. 한 량의 정원은 180명, 그러나 실은 400명이 타야만 한다”(84쪽).
순수에서 경험의 문턱을 넘어선 입사자들은 비로소 세상의 무서운 속성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곳에서…왜 고작 이 따위로 사는 걸까”(87쪽) 또는 “왜, 이 열차는/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가”(91쪽)와 같은 회의와 반성의 순간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모종의 적극적 실천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는 데에 박민규 소설의 문제적 성격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그것은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아니었으며, 누구를 원망할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72쪽)고 짐짓 ‘쿨한’ 태도를 취하며, “열심히 사는 거 외엔 달리 방법이 없는 게 아닌가”(88쪽) 체념하고 물러 앉는다. 요는 “세계의 거대한 톱니”(177쪽)를 벗어난 ‘바깥’이란 없다는 것이다.
박민규 소설에 자주 출몰하는 외계인과 우주선, 괴물 같은 동물들의 환상은 그가 세계를 상대로 한 싸움을 주관적 회피와 위안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왕년의 ‘운동권’ 출신으로 지금은 농촌 공동체 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코리언 스텐더즈>(‘스탠더즈’가 맞는 표기 아닐까?)의 주인공 ‘기하 형’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인과 유에프오의 습격 때문에 농사를 망치며, <대왕오징어의 기습>에는 “모두가 무방비인 채 그들의 습격을 받아야 했다”(232쪽)는 표현이 나온다. 유에프오와 대왕오징어를 우리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것은 혹시 ‘패배주의’가 아닐까.
박민규 소설의 문제적 성격을 이렇게 내용의 측면에 국한해서 설명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대부분의 좋은 소설들이 그러하듯 박민규의 소설에서도 형식적 특성이 내용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방법적 갱신을 향한 모색과 시도는 박민규 소설에서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낳는다. 우선, 그는 문단별로 한 행씩을 띄우는 인터넷 글쓰기 방식을 일관되게 사용한다. 때로는 한 문장이나 구절, 하나의 단어가 독립적으로 하나의 ‘연(聯)’을 이루기도 한다. 실제로 박민규 소설의 어떤 대목은 내용에서나 형식에서나 1980년대 장정일의 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22쪽, 34~5쪽, 304쪽 등). 인터넷 카페의 ‘펌글’이나 잡다한 정보를 통째로 들어다 놓은 듯한 부분도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런 형식적 특성은 가독성을 높인다는 점에서는 일단 긍정적이다. 컴퓨터 모니터 상의 글 읽기에 익숙한 젊은 독자들에게 박민규 소설은 종이 텍스트라는 이질감을 최소화하는 효과를 지닌다.
쉼표와 행갈이, 그리고 모쪼록
반면, 수시로 한 행씩을 띄우고 쉼표를 박아 넣는 과정에 작동하는 단절과 비약의 기제는 논리적이며 유기적인 서사를 불가능케 한다는 문제점을 낳는다. 박민규 소설의 주인공들이 상황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환상 속으로 도피하곤 하는 버릇이 이런 형식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일자리보다 보수가 높은 푸시맨 아르바이트를 소개 받은 소년이 “내 주변에 그런 고부가가치 산업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제의를 받은 사실만으로도, 갑자기 확 고도산업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한 느낌이었다”(71쪽)고 감격한다거나 유원지에서 하릴없는 청춘의 나날을 보내는 젊은이가 “간혹 외로운 밤이면, 심야전기처럼 저렴한 내 청춘이 흐린 전구처럼 못내 밤을 밝히기도 했다”(129쪽)고 토로할 때 박민규의 유머러스한 문장은 짙은 페이소스를 수반하며 독자의 가슴에 아련히 스며든다. 그러나 작가가 즐겨 구사하는 ‘곁가지의 글쓰기’와 몽상의 자가발전은 때로 통제불능의 상태로 빠져들면서 의미 없는 말의 유희로 떨어지기도 한다. ‘뭐랄까’라는 허두가 그의 구어투 글쓰기를 특징짓는 요소라면, ‘모쪼록’이라는 부사는 아무래도 문맥에 안 어울리게 쓰인 게 아닌가 싶다(69쪽, 184쪽, 263쪽, 287쪽 등). “그리고 이 년 전의 일이, 즉 LA의 8번가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253쪽)거나 “뭔가 몸이 붕 뜬 느낌이었고, 나는 정신없이 매트를 향해 머리를 추락했다”(260쪽)와 같은 비문과 어색한 문장도 정비가 필요해 보인다.
박민규 소설에 대한 기대 8, 불만 2의 이 글을 그가 읽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짐작되지 않는 건 아니다: 수고하셨다. 그리고, 좃까라 마이싱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