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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1 16:10 수정 : 2005.01.21 16:10

스트레인지 뷰티

/조지 존슨

지은이가 붙여온 제목: 지하철에서 과학 도서를 읽는 사회를 꿈꾸며

요즘 연구를 위해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 의대에 와 있는데, 며칠 전에 뉴욕 지하철에서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텅 빈 지하철에 어떤 할아버지와 나란히 마주보며 타고 가는데, 그 할아버지 손에 하얀색 표지의 두꺼운 페이퍼백 한 권이 들려있었다. 문득 궁금해서 표지의 제목을 살펴보니, 라고 씌여 있었다. <스트레인지 뷰티>(승산·2004)라면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된 바 있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머레이 겔만의 평전이 아닌가? 백발이 성한 할아버지가 지하철에서 물리학자의 전기를 읽고 있다니.

자기가 읽고 있는 책에 관심을 보인 내가 흥미로워서였는지, 할아버지는 내 옆자리로 슬며시 건너와 자신이 읽고 있는 책에 대해 이런저런 소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책을 쓴 조지 존슨은 <뉴욕타임스> 과학담당 기자인데 평소 이 사람의 글을 좋아하지만 이번 책에는 머레이 겔만에 대해 솔직한(그래서 부정적인)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 ‘좀 잔인했다’는 논평으로 말문을 열었다. 넌지시 내 전공이 물리학이라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갑자기 신이 나서 속사포처럼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학계에서 머레이 겔만과 리처드 파인만 중에 누구를 더 천재라고 쳐주느냐’는 질문이 나왔을 때에는 마치 내가 물리학과 대학원생과 얘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그에게 “리처드 파인만을 더 좋아하지만, 이 책을 읽고 머레이 겔만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됐다”고 말해주었다. 어린 시절 워낙 똑똑했던 겔만은 월반을 계속해 21살에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박사를 받았지만, 또래와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청소년 시절을 물리학에 송두리째 저당 잡혀야만 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아내를 잃고 가정의 위기를 맞은 데다가 학문적 고뇌까지 겹쳐 힘들었으며, 평생을 리처드 파인만과 경쟁하면서 살아야만 했다. 세상이 일찌감치 인정해준 천재 물리학자에게도 나름의 고뇌는 있었던 것이다.

지하철에서 할아버지와 나눈 15분 남짓한 대화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즐거웠지만, 미술관에서 일한다는 할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유쾌한 충격이었다. 과학책이라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읽어본 적이 없는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며 사는 우리나라에서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와 지금은 천체물리학을 공부하는 후배가 들려준 일화는 더욱 놀랍다. 후배가 미국에 와서 가장 놀랐던 기억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저명한 천체물리학자의 ‘중력렌즈’ 강연을 들을 때였다고 한다. 가산점을 준다고 해서 들으러 갔는데, 강연장 앞에 웬 길쭉한 리무진이 한 대 서더니, 차에서 정장을 한 노부부가 내려 강연장으로 들어가더라는 것이다.

강연장에 들어가 보니, 자기 또래의 학생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장을 하고 천체물리학 강연을 즐기러온 노부부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맨 앞에 앉아서 강연을 듣고, 열심히 질문하고, 나중에는 자기네들끼리 우주에 관한 담소를 나누더라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예술의 전당에서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듣는 것처럼, 과학자의 강연을 즐기고 있었다.

미국의 저력이 샘나도록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었다. 과학이 경쟁력이 아니라 ‘문화’인 세상, 바로 내가 꿈꾸는 세상인데 말이다. 정재승/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시스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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