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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1 16:53 수정 : 2005.01.21 16:53

예술·보살 잘 통하네
길희성 교수 ‘보살예수’

예수 그리스도와 대중불교의 꽃인 보살. 둘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보살예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발을 살 수 있는 제목이다. 그러나 저자 길희성 교수의 시도는 표피적인 거부감만으로 재단할 거리에 있지 않다.

이 책은 서강대 명예교수인 길 교수가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주최로 지난해 봄에 연 일요신학강좌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란 제목으로 10회에 걸쳐 강의한 내용이다.

길 교수는 “부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도 깨달음, 자각, 각성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의 궁극적 구원인 사후 열반은 그리스도교의 사후 구원인 부활을 통한 영생과 대비됩니다. 열반은 ‘나’라는 것이 없는 무아적 구원임에 반해,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사후 하느님 나라의 영생은 하느님의 품 안에서 주어지는 영원한 평화이며 하느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오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이지만, ‘나’라는 개인 혹은 인격이 어떤 형태로든 존속하는 구원입니다.”

길 교수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에서 공과 하느님을 대비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공이 불교에서는 궁극적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며,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 외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덧없고 상대적이어서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며 만남을 시도했다.

예수님이 불교 문화권에서 탄생했다면 틀림없이 자비로운 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리라는 길 교수의 창조적 시도가 불교와 그리스도를 새롭게 보는 안목을 선물해주고 있다.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선을 향한 죽비소리
‘종림 잡설 망량의 노래’

‘나는 누구일까. 일차적으로 종림이라고 하는 물건이다. 누구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누구의 아들일 수도 있다. …‘나’라는 중심 고리를 하느님에게 걸어도 좋고, 부처님에게 걸어도 좋다.’

그냥 보기만 해도 ‘무아적’으로 느껴지곤 하는 종림 스님다운 ‘자아관’이다. 그가 <종림 잡설 망량의 노래>(호미 펴냄)를 썼다. ‘망량’이란 이매망량의 준말로 산과 물, 나무와 돌 따위의 정령 도깨비들이다. 그가 <해인지> 등에 쓴 글을 주위에서 억지로 모아 책을 펴내자 그는 ‘잡설’과 ‘도깨비의 웅성거림’이란 제목을 달았다.

고려대장경연구소장인 그는 평소 만화를 지독히 좋아한다거나 60살이 다 되어서도 스승 지관 스님(전 동국대총장)을 두려워하고, 주위에서 종교, 직업, 나이, 신분에 관계 없이 따르는 사람이 많다는 등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어눌함 속엔 깊은 철학적 사유가 숨겨져 있다. 해인사의 ‘소싯적’부터 관습적인 불교적 유산에 과감히 의문을 제기했던 그다움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는 불교와 선을 종지로 삼으면서도 교조화를 극도로 경계한다. 그는 “선이 논리성을 상실함으로써 이념화의 길을 잃고 사회적인 윤리를 실천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또한 “종교적 인간이 현실의 대지에서 발을 뗀 채로 지내다 보면 허공을 헤매는 망령이 될 뿐이요, 역사적 인간이 당장의 현실에만 눈을 두다 보면 끝없는 윤회를 반복할 뿐”이라고 양쪽의 허구를 함께 내려치고 있다. 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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