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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1 18:04 수정 : 2005.01.21 18:04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

의미없는 세계에서
의미찾아 사는 게 인간
경험 바탕 언어의 힘 빌려
‘의미의 집’짓는 게 인생
그 집 위해 노력한 난
행복한 허무주의자

박이문(75·미국 시먼스대학 명예교수)씨는 길 위에 선 철학자다. 40여 권에 이르는 저서는 그가 걸어온 길에 남긴 족적이다. 그가 노년의 한 고비에서 또 하나의 발자국을 찍었다.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이란 이름표를 단 이 책-발자국은 방향이 정반대다. 긴 시간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 그 궤적을 되짚고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자서전이다. 회고조의 철학적 에세이들이 여러 편 묶여 한 진지한 인간의 내면 풍경화를 이룬다.

사람이면 저마다 삶이 길이겠지만, 이 철학자에게 길은 좀더 특별한 이미지를 지닌 것 같다. 충남 아산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뒤, 어떤 제어하기 힘든 갈망과 열정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소르본대학에서 불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통상의 학자라면 여기서 삶의 방향이 결정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철학으로 관심을 돌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뒤 거기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생활을 하다가 예순이 넘어 한국의 대학 강단으로 돌아왔다. 이 간단치 않은 인생행로는 그대로 그의 내면의 행로를 보여준다.

그의 삶에는 몇 개의 결정적 변곡점이 있다. 10대 중반 초등학교 졸업반의 시골 소년이 대학생 형이 남겨두고 간 문학책들을 들춰보면서 받은 충격이 첫 번째 변곡점이다. 안온하고도 평화로웠던 소년은 한없이 넓고도 화려하게 펼쳐진 다른 세계를 접하고서 자기가 속한 작은 세계가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포근했던 시골 마을이 어지러워지고, 멋있어 보이던 동네 사람들이 초라해 보이고 무한히 넓은 줄로만 믿었던 들과 산이 답답한 공간으로 변했다.” “나는 나의 세계가 좁고, 어둡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앙드레 지드가 〈지상의 양식〉에서 ‘나타나엘’을 호명하며 좁은 방과 집과 골목과 도시를 떠나라고 이야기한 것과 같이, 그는 자기 자신에게 더 넓은 세계로 뛰쳐나가라고 말한다. 그 세계로 나가는 문으로 그는 불문학을 선택한다.

그에게 현세적·실용적 욕망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가 보다.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그는 장 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발견하고 자기 내부의 진정한 욕구를 뚜렷하게 의식한다. 우울한 내성적 문학 청년은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를 찾아 방랑과 편력을 자청한다. 그에게 또 하나의 본질적 욕구가 있었는데, 그것은 세계와 우주를 전체로서 투명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욕구였다. 만물의 원리를 통찰하고자 하는 욕구와 실존의 근원적 의미를 알고자 하는 욕구는 서로 길항하며 행로의 방향을 규정했다. 지적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어느 순간 깨달음의 쾌감에 부들부들 떨기도 했다. 그는 실존주의의 후예로서 그 삶의 방향을 ‘자유로운 실존적 결단’에 따라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 가볍지 않은 이력 위에서 그가 얻은 철학적 결론은 ‘허무주의’다. 그 허무주의는 인간의 삶도 세계의 존재도 궁극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의미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찾으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의미가 없으면서도 의미를 찾는 것, 이것이 인간의 모순적 운명이다. 그렇다면 인생이란 어떻게 하여 의미를 담은 그릇이 될 수 있는가. 그는 소설이 상상의 가공물로서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해도, 그 텍스트 자체로 미학적·윤리적·정신적 가치를 지니듯이 인생도 그 인생의 주인공이 작가가 돼 스스로 쓰는 하나의 소설적 텍스트로서 독자적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경험을 질료로 삼아 언어의 힘을 빌려 존재의 집, 의미의 집을 짓는 것이 인생이다. 그 집을 지으려고 쉬지 않고 노력해온 그는 ‘허무주의자’이되 ‘행복한 허무주의자’이며, 그 행복은 ‘열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이 책은 이야기해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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