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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우드
그 대목을 읽다 문뜩 떠오른 악몽 같은 장면이 있었다. 아비 된 자가 자식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광경이었다. 어찌, 아비의 입술에 묻은 피가 갓 태어난 혈육의 것일 수 있단 말인가. 여섯째가 태어날 무렵에야 여인은 기지를 발휘한다. 아이만한 바윗덩이를 포대기에 싸 아비에게 건네준 것이다. 이쯤해서 넋을 찾고 책을 다시 보니, 이렇게 씌어 있었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먹어치우며, 그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를 집어삼키도록 몰아세우고 있다.”
닐 우드의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개마고원 펴냄)는 몰락의 징조를 보이고 있는 자본주의와 미국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은 역사에 기록된 대제국들은 모두 몰락했고, 그 원인은 내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화무십일홍이라 하더니, 제국도 결국에는 덧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제국의 뼈대를 갉아먹고 있는 좀벌레는 무엇일까. 지은이는 그것을 탐욕과 민주주의라 본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것은 자본주의는 실패 때문이 아니라 성공 때문에 붕괴할 것이라는 슘페터의 주장이나, 미국의 헤게모니에 이바지했던 요소들이 미국의 쇠퇴를 불러올 것이라는 월러스틴의 생각과 뜻을 같이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인류사에서 탐욕과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사회통합을 막는 암적인 요소로 여겨왔다는 점이다. 탐욕에 대한 종교적 경고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18세기 무렵 상황은 뒤바뀌었다.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었던 탐욕이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떠받들어졌다. 이제 흉물스런 탐욕이란 맨 얼굴에 화려한 수사가 덧칠되었으니, 그것을 이윤이나 자기이익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주의 깊은 접근을 필요로 한다. 철학사에 이름을 올린이 치고 민주주의를 비판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인민의 직접 지배는 사회적 부패를 증대시키고 도덕적 타락에 적합한 조건들을 창출”한다고 여긴 탓이다. 이들의 대안은, 플라톤의 <국가>를 떠올리면 될 듯한데, 사회신분의 차별을 뚜렷이 하고 유산계급이 지배하는 국가였다.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것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 노동자들의 저항 덕택이다. 이때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평등을 아우르는 개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앞에만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러다보니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기업이 정부와 정치마저 지배하게 된 것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눈속임으로 전락”했다.
이윤으로 옷을 갈아입은 탐욕과, ‘재력가 통치’로 변질된 민주주의는 더 이상 사회통합을 이뤄내지 못한다.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는 불평등구조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자식들을 잡아먹은 아비는 크로노스였다. 이 신화는 정치적으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우라노스를 거세한 낫은 탐욕과 민주주의를 숫돌 삼아 벼렸다. 봉건에서 자본주의로 옮겨 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크로노스는 노동자·농민·여성·제3세계 민중·자연이라는 자식들을 잡아먹고 있다. 본디 크로노스는 시간이나 세월을 뜻한다. 자본주의와 미국도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탄생, 성장, 소멸의 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결코 저절로 몰락하지 않았다. 제우스의 도전이 있었기에 왕좌에서 물러났다. 나는 “또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고 외치는 세계사회포럼(WSF)에서 제우스군단을 목격했다.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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