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1.28 19:29
수정 : 2005.01.28 19:29
한창훈(42)씨가 새 소설집 <청춘가를 불러요>(한겨레신문사 출판부)를 펴냈다. 표제작을 비롯해 단편 10편이 묶였다.
제목에서는 ‘청춘’을 노래하건만, 막상 소설집에서는 청춘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얄궂은 노릇이다. 펑퍼짐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아니면 벌써 손주까지 본 노인들 일색. 청춘은 다만 지난 시절의 아린 추억으로만 되새겨질 따름이다.
표제작의 주인공 역시 나이 일흔에 가까운 손 여사와 이 영감. 손 여사의 효자 아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영화 <죽어도 좋아>를 함께 본다. 노인들의 성을 다룬 이 영화에 주제가처럼 삽입된 노래가 바로 ‘청춘가’다. 청춘을 떠나보낸 뒤에, 지나간 청춘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 “젊은 것 늙은 것이 늙은인디…”라는 손 여사의 탄식은 이 소설과 소설집의 주제의식을 압축하고 있다 할 것이다.
표제작에서 당위로서 제시된 노년의 성은 <주유남해>와 <꽃 피는 봄이 오면>에서는 구체적인 형태를 얻는다. 이혼한 아들이 맡긴 손주들 때문에 석 달째 방사를 치르지 못해 공연히 심통이 난 <주유남해>의 주인공 오씨. 부부 단둘이 나선 야간 어로 작업 도중 기관이 멈추자 문제를 해결한다며 차가운 밤바다 속으로 들어갔다가 정신을 잃는다. 깨어 보니 알몸인 채 누워 있는 자신을 역시 알몸인 부인 세포댁이 이불처럼 덮어 주고 있는 게 아닌가. 몸을 덥히겠다는 뜻이겠지만, 정신이 돌아온 오씨에게야 하늘이 내린 기회가 따로 없다.
<꽃 피는 봄이 오면>은 김유정의 단편 <동백꽃>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매사 티격태격하던 도시 출신 요양객 정씨와 산골 아낙 부강댁이 논에서 실수로 넘어지면서 ‘입술 박치기’와 포옹을 한다는 결말이 영락없이 그러하다.
작가가 중·노년층 인물들과 함께 여성 주인공들을 즐겨 내세운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두세 편의 예외를 제하면 나머지 작품들은 대부분 여성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온 세 딸을 주인공 삼은 <깊고 푸른 강>이 대표적이다. 딸이라고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으며 박대 받았던 자신들은 오히려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건만 아들 둘은 자식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현실을 두고 그들은 듣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원망처럼 말하는 것이다. “아부지. 밥 먹여서 아들들 참 잘 키워놨소.”
<복국 끓이는 여자>에 오면 작가가 생각하는 여성성의 정체가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주인공은 시장 귀퉁이의 허름한 복국집 주인인 남해댁. 그는 어느 날 형편없는 몰골로 가게에 들이닥쳐 쓰러진 젊은 러시아 여성을 헌신적으로 돌본다. 자신의 장기인 복국을 끓여 먹이며, 한국어를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방의 여자에게 간곡하게 하는 말(“무슨 사연으로 여기까지 왔고 어제 무슨 일이 났는가도 모르겄지만 어쨌든 몸 간수 잘 하구. 술 너무 많이 먹지 말구, 얼른 돌아가서 잘 살어. 알었지?”)은 남해댁의 여성성이 바로 모성성임을 말해 준다. 지난 시절 수배자의 처지가 된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를 제 집에 숨겨 주었던 <바위 끝 새>의 여주인공 역시 남해댁과 함께 ‘여성=모성’의 등식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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