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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04 18:35 수정 : 2005.02.04 18:35

발해제국사 \

발해왕조가 고구려를 계승한 민족사 일부분이라는 것은 한국인만의 상식이다. 동북공정을 진행중인 중국은 지방정권으로 격하시키고 있고, 연해주가 발해강역이던 러시아나 사신교류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일본쪽 학계도 다민족 국가로만 이해한다. 그네들이 사료를 빌어 제기하는 근거들 가운데 제일 약한 고리가 발해의 민족구성은 말갈+고구려계란 등식이다. 당나라 사서인 <신당서>에 건국자 대조영이 말갈인이라고 쓴 기록이 있고, 당대 외국인 방문기록에 발해 촌락인구의 대다수를 말갈인이 점하고 있다는 기록 등이 그러하다.

북방민족사 연구자가 쓴 이 책은 역시 당대 문헌기록들로 이런 내용들을 반박한다. <구·신당서> <삼국사기> 등 당대 문헌자료에서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임을 언급한 단편 자료들을 추적해 34개 항목에 걸쳐 정리했다. 항목들은 발해 건국과정과 중국의 발해국왕 책봉과정, 국호의 의미, 해외교류관계, 정치·경제·문화상에서 고구려와의 친연성 등을 다룬다. 그물망같은 사실관계 속에서 발해사를 고구려 적자로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다.

글의 목청이 높아지는 대목은 발해국의 말갈족 다수설이다. 발해 멸망 뒤 여진족 분포나 고구려 말 자료만으로 파악한데서 비롯된 편견이라는 견해다. 발해 총인구의 70~80%이상이 고구려계였으며 말갈 사람들은 별로 많지않았다는 말이다. 발해국의 지방통치기구로 정착농경민을 위한 주현제만 있었고 말갈 같은 유목민을 위한 부족제는 없었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뒤 말갈인은 당나라의 박해로 흩어졌으며 많은 이들은 고구려 인에 동화되어 말갈적 혈통을 자처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면서 “말갈 7부의 대부분이 흩어져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신당서>의 기록을 거꾸로 인용했다. 2대 무왕이 727년 일본 쇼무천황에게 보낸 국서에서 발해가 고구려 옛땅을 회복하고 부여풍속을 지킨다고 알린 점, <속일본기> 등의 사서가 발해사신을 고려사신으로 적은 점, <구당서>, 유학생 최치원의 편지 등 곳곳에서 발해 건국의 주체가 고구려계임을 일러주는 증거가 보인다는 점도 들고있다. 도읍터가 옛 말갈인의 땅이어서 말갈국가라는 중국사서의 논리는 국가건립 주체를 왜곡하려는 의도라고 일갈한다. 민족주의 시각을 견지하되 생소한 문헌비교를 통해 논의의 근거를 이끌려는 노력이 보이는 책이다. 발해멸망 뒤 유민 반란과 관직 진출상을 소개한 요, 금나라 사서의 유민열전, 발해 건국자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이 세운 소국인 진국이 발해로 발전했다는 북한학계의 연구성과 등도 나와있다. 발해 사료문헌에 대한 해제글이 말미에 있다.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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